<어서와 한국이 처음이지? 독일편>을 2회까지 시청하고 나니, 자연반사적으로 독일인과 독일의 국민성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오른다. 물론 한 나라의 국민성 분석이 지나치면 편견을 공고화하고, 때 늦은 스테레오 타입만 강화하며, 종국에는 혈액형 분류설처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인종차별 발언으로 빠질 수 있다는 위험이 상시 도사리고 있기에, 국민성론을 읽을 때는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도 이미 외국 여러 나라에서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된 Xenophobe's Guide 시리즈라면 적당한 선에서 잘 조절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실제로도 읽어보니 해당 국가에서 오래 거주한 외국인, 또는 해당국 국민이나 타지에서 오래 살아서 모국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저자들 위주로 집필진을 구성했으니, 최소한의 균형성은 보장된 셈이다. 그렇게 믿고, 이 아슬아슬한 (그리고 얇은) 국민성 해부서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서가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의 제목은 <유시민과 함께 읽는 독일 문화 이야기>였다. 2000년대 초입 즈음에 유시민 작가가 독일 유학 중에 집필한 책이 다양했기에, 아마 이 책도 그 시절에 작은 에세이 형식으로 쓴 책인가보다 싶었다. 이전에 유시민 작가의 책 중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개인적인 취향 차는 차치하더라도, 이 사람 정말 글을 잘 쓴다) 냉큼 대출을 했더랬다.


그런데 서문을 찬찬히 일거보니, 유시민은 편역을 담당했고 실제 저자들은 따로 있었다. 즉, 이 책의 원전은 종종 입소문으로 많이 듣던 외국발 문화 에세이집: Xenophobe's Guide의 편역판이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Xenophobe's Guide는 각국의 문화를 이방인(혹은 이방인으로 봐도 무방한 객관적 시각의 자국인)들이 집필하는 '가볍고 유쾌한' 문화론 에세이다. 짤막짤막하게 한 나라의 문화 이야기, 때로는 친숙한 국민성 개그 모음집 같기도 하여 마치 저자들의 수다를 읽는 기분이다. 완독 후에 저자를 확인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이 책을 쓴 독일인들도 현재 생의 절반 가까이를 영국에서 거주 중인 앵글로마니아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앵글로 필리아 혹은 앵글로 마니아들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을 못 느끼는 편이지만) 어쨌든 우울한 마음을 달래며 가볍게 읽기에 좋았으니, 책의 효용을 다한 셈이다. 게다가 최근 완독하고 정리를 준비 중인 영국인론 서적 <Watching the English>와 비교하면서 교차검증을 하기에 좋은 부분도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회상을 꺼내봐야 겠다. 편하게 술술 읽다보니, 14년도에 독일사 수업을 들으면서 배우고 토론했던 내용들이 새삼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그중 두 가지를 적어보자면, 1) 독일은 이웃의 프랑스, 영국 등과 달리, 오랫동안 지역 공국이 개별적으로 혼재하며 공존한 역사를 겪었기 때문에, 언어(독일어, Deutch)만이 그들의 유일하며 최초의 민족 정체성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는 점. 2) 그 결과 19세기에 인위적으로 '독일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했을 때, 본래 독일어를 뜻하던 Deutch가 그대로 '독일인'을 뜻하는 말로 전용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즉, 독일의 민족정체성 형성 과정에서는 언어가 지정학적 공간(국경, 지역 통합 등)에 선행한다. 실제로 도이칠란트라는 지명 또한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해보니, 확실히 독일의 역사 연구가들이 '독일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흔히 독일의 독일사 개론서에서 서술되는 독일사의 전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오랫동안 개별 공국으로만 존재하던 도이치인들이 19세기에 비로소 제 2제국을 거치며 통합을 이루었다가, 나치의 비극이 이후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1989년에 '재통합'을 이루었다. 독일의 역사는 곧 '통합을 향한 경주'의 역사다.' 이른바 '근대식 국민국가'와 '통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보면 수긍이 가는 서술 방식이다. 그렇다면 '통합의 독일사'라는 주제를 계속 이끌고 간다고 할 때, 1989년의 동서 통일 이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각에서는 이제 유럽통합이 독일사가 걸어갈 '통합을 향한 경주'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일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역사에 시작과 끝이 있으며, 한 국가의 역사는 특정 목표 지점(독일의 경우 '재통합')을 향해 달려간다고 보는 단선적 역사관 자체에는 과연 의문의 여지가 없을까?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배웠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고, 여러 상충하는 생각들이 교차한다. 현실의 역사는 순환한다지만, 역사학이란 본래 과거의 사건들을 인과관계와 논리 틀 속에서 구성, 서술해야 하는 학문이니 만큼,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가피하게 단선적 사관의 서술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각설하고,책에서 읽은 '독일인론'에 대한 간략한 인상 및 기억하고픈 사례를 정리해본다.




* 독일인론의 핵심 키워드: social dis-ease


케이트폭스가 <Watching the English>에서 영국인의 사회적 불안감(어색함)을 묘사하게 위해 고안한 단어 'social dis-ease'를 잠시 차용해야겠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이것만큼 독일인 심상의 기저를 이루는 핵심 요소는 없다. 폭스가 묘사한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독일인들도 불확실성을 극도로 경계하기 때문에 쉽게 타인과 친밀하게 지내기를 어색해 하고, 자기만의 성(castle)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적 공간에 극도로 집착하며, 규칙과 질서를 중시한다. 더 나아가서, 이들의 불확실성에 대한 기피는 감각(경험)보다 관념(이데아, 추상)을 중시하는 성향과 맞물리면서 언어, 철학, 기본 매너에 이르기까지, 영국과는 또 다른 측면의 문화 습성을 형성한다.


~ 독일인은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경계 짓는다. ~


1.  독일인들은 해변에 놀러가면  가장 먼저 일인용 텐트를 설치한 다음, 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즉, 이들은 휴양지의 해변을 쏘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모래성으로 구축한 '자기 경계' 안에서 쉬는 것을 선호한다.

2.독일어는 모든 철자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발음한다. 프랑스어의 쓰인 철자의 절반은 발음을 생략하는 관습, 무한한 연음(liason), 영어의 불규칙한 모음 규칙 등은 독일어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국인의 성 Featherstonehaugh를 독일인이라면 간단히 발음나는 대로 Fanshaw라고 쓸 것이다! 그러니 독일어에는 프랑스어의 accent 같은 발음 기호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3. 칸트의 정언 철학에서 드러나듯이, 독일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범주화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category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정신 나간 칸트는 모든 사물을 더 작은 범위로 분류시켜 집어넣겠다는 무시무시한 계획-독일의 관념 철학을 탄생시켰다. 경험이 관념에 선행한다고 보는 영국의 경험주의나, 경험-관념 논의는 제쳐두고 현실의 적용 가능성부터 생각하는 미국의 실용주의와는 매우 다르다.


4. 불확실성에 대한 극심한 공포는 독일인들을 지독한 종말론자로 만들었다. 그들의 관념 속에서 인생과 세계는 '원래부터 고통스러운 것'이고, 불행한 사건을 낙관이나 해학으로 받아넘기는 식의 반응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똑같이 '인생은 원래 안 풀리는 것'이라고 보면서도 그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블랙유머로 웃어 넘길 것을 권하는 영국 문화와 차이가 난다.) 미래를 알 수 없고, 불확실한 상태가 두렵다보니 늘상 만사에 긴장하게 된다. 낙관적으로 삶을 즐기기보단 만사를 계획하고 대비하는 것인데, 이런 심리의 사람들이 인생의 불행이나 고통을 쉽게 웃음으로 소비해 넘기기란 확실히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자주 인생의 고통과 고독에 대해 말하며, 이때 사용되는 톤은 한 치의 가벼움도 허락되지 않는다. 비관주의가 기본이되, too much earnestness를 극도로 지양하는 영국인과는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요약하자면, 독일인들에게 인생과 세계는 '항구적 비상사태'이다.


5. 불확실성은 '저주'이기 때문에, 인생 진로를 바꾼다던가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 등의 선택은 '도전'이나 '잠시 멈추며 자아 성찰을 하는 것'이 아닌 미친 돌발 행동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불확실성이 싫어서 인생의 각 단계가 착착 예정되어있기를 바라니, 교육 체계도 어릴 때부터 전문가와 노동자, 학자를 분류해 놓으며 그 사이의 이동은 비유동적인 편이다. 한 마디로 인생의 진로 선회에서 융통성이 적은 편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설계돼 있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얻어낸 학위, 자격증은 그 사람에게 최고의 자부심이 되며, 특히 학위가 있는 학자들은 사회적으로 지식을 뽐내며 존중받게 되고, 또 존중받기를 기대한다. (한국과는 다른 이유에서 학력, 학벌이 경외시되는 사회.)


이런이유로, 그들은 학식과 교양 자랑하기를 즐기며 (겸손으로 가장하며 은근히 자랑하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아는 것을 늘어놓는 데 매우 솔직하다!), 누군가 실수하는 것을 발견하면 상대방의 심경을 고려하지 않고 즉석에서 문제점을 지적한다. 실수 지적에서 돌려 말하기란 없다. 실수를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해서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6.지적할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지적하니, 오히려 편하고 좋을 것 같다고? 천만의 말씀. 독일에서 오래 거주한 외국인들은 독일인만큼 자기 의견을 물릴 줄 모르는 고집 센 사람들도 없다고 투덜거린다. 경계가 소중한 독일인들에게 자신의 선호나 의견이 반박당하는 것은 자신의 경계가 침범당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기도 잘 하고, 의견이 다를 경우 쉽게 바꾸지도 않는다. (토론문화가 잘 정착된 것은 어릴 적부터 익힌 학습 시스템의 결과인데, 이게 독일인 개인의 고집과는 별개로 작동한다고 한다!)


7.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social dis-ease 문제 때문에 반응을 예상할 수 있는 애완견에 대한 사랑은 엄청나다. 단,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고양이는 개보다 인기가 적은 편이다. 이런 점은 영국과 비슷한데, 한편으로 줄서기(queuing)에 목숨을 거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독일에서 줄서기는 잘 지켜지지 않는 편이다(!) 그토록 경계짓기에 집착하면서도 새치기를 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다. 강박적일 정도로 늘상 줄을 서는 영국인과 달리(심지어 이들은 버스 정류장에 혼자 서 있어도 줄을 선다) 독일인들은 여느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흩어져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차가 도착하면 재빨리 자리를 선점하려 달려간다. 영국처럼 소심하게 눈치 보면서 은근슬쩍 끼어드는 법은 없다. 먼저 차지한 사람이 그 영역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갖고 싶다면 열심히 서둘러야 한다. "그들의 살벌한 눈빛을 사용해서!"


8. 이들은 만사를 계획하고 기획해야 안심하는 성격이기에, 취미와 여가 또한 반 공적인 형태로 조직되어야 한다. 취미생활을 즐기되 그 활동은 동호회라는 조직을 통해서 집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사회성은 떨어지면서 집단에서 떨어져 홀로 남는 것에는 더 학을 뗀다.) 이들의 축제는 브라질의 카니발처럼 즉흥적으로 진행되기보단, 한 달 여의 준비와 기획을 통해서 세밀하게 예정된 바를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그들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무질서를 조성"한다.... 


9. 영미권의 스몰 토크는 독일인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갖지 않는다. 그보다는 '존재의 괴로움', 사회적 위기현상, 세계 종말, 환경 등 '유익한' 주제를 심오하게 토론하는 것을 더 멋있게 친다. 영국인들이 사교 대화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스러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의미 없이 날씨 얘기로 한 시간이나 스몰 토크를 이어가는 영국인을, 독일인은 허탈하다고 여긴다. 이들에게는 농담과 유머 역시 사전에 계획된 시점에 튀어나와야 하며, 예정된 시점에서 예정된 유머가 튀어나올 때 비로소 독일인들은 껄껄 웃는다.


10. 그렇다면 엄격하고 관념적인 독일인들이야말로 개인주의가 득세할 테니, 독일은 민족주의가 기를 펼치지못하는 곳일까? 그럴 리가! 이곳은 나치의 발상지였다. 불확실성에 대한 극심한 공포 탓에 '경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울타리와 소속감이 주어지면 독일인들은 급속하게 그 집단주의에 빠져든다. 오죽하면 '독일인 둘이 만나면 철학을 논하고, 셋이 모이면 서열을 정해서 군대를 조직한다'는 농담이 있을까. 독일 역사 속에서 독일이 통일을 이룩했을 때마다 타국과 전쟁을 일으킨다는 속설(비스마르크의 1차 통일과 1차 대전, 2차 통일과 나치의 등장)도 만약 우스개 소리만은 아니다. 그래서 타 유럽 이웃국가에 비해서 독일인들은 동호회 활동에 진지하게 임하고, 연장자와 노인들의 권위 또한 비교적 엄격한 편이다. 철저한 경어 사용(Sie)이나 호칭 부르기(Herr Doktor)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덧붙여서, 이 같은 집단주의의 비극이 재등장하는 비극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독일만큼 유럽통합을 지지하는 나라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독일 마르크(일명 D-마르크)에 대한 독일인들의 미련 또한 질척질척했다. 1871년에 처음 통일을 이룬 후에야 만들어진 화폐, 공통의 정체성이라고는 언어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드디어 얻어낸 공통 화폐는 얼마나 애착의 대상이었을까? "게르만은 숲에서 태어나고 숲에서 죽는다"는 속담에 대한 집착도 그렇다. 2천년 전 로마 시대에서나 적용될 법한 '숲의 게르만' 선조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그러나 그리운 민족의 추억이 되어서 아직까지 독일인들을 향수에 젖게 한다.



*마무리

요약하자면,이렇게 구분짓기를 좋아하는 것이 독일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라면, 나로서는 살기에 조금 답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불확실성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심리가 큰 만큼, 한때는 차라리 내 인생에서 직업이나 진로가 타인에 의해 정해지기를 바란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때로는 혼란스러움(chaos)가 주는 자유가 더 편할 수도 있다는 것, 특히 우리 시대처럼 젊은 세대가 맞이해야 하는 불확실성이 더더욱 커지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안다. 나 또한 (폭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social dis-ease'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역시 적당히 융통성 있는 분위기가 살기엔 더 편한 것 같다. 게다가 미래의 불확실성이 무서워서 미래 계획에 몰두하다가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의 심리적 타격이 얼마나 큰지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 '독일인 일반론'의 견해가 그토록 환상적으로 느껴지지만은 않는다는 것. 



cockt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