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bie McGowan의 2015년 작, <When Skies Have Fallen>의 표지. 편집부 서문에 따르면, 위 사진 속 인물들은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다고 한다. 
Debbie McGowan의 2015년 작, 의 표지. 편집부 서문에 따르면, 위 사진 속 인물들은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다고 한다. 


표지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하다 만난 옛 사진. 2차 대전기.
표지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하다 만난 옛 사진. 2차 대전기.


※ 이 글은 해당 소설에 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파리어콜린스 연성을 위한 참고자료 조사 차원에서였다. 2차대전기 게이 참전 군인들의 경험을 연구, 기록한 서적이 있을까 알아보고 싶어서 무작정 아마존에 키워드를 넣고 검색을 돌렸다. 참고문헌 찾기란 늘 어려운 일이기 마련이지만, 이 경우 내가 이쪽에 가진 배경지식이 적다 보니 더더욱 자료 검색이 어려웠으며, 특히 영국군의 사례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책은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 정보 검색 능력이 취약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양차 대전 시기 LGBT 사회에 관한 연구서 자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기대했던 바를 솔직하게 밝히자면, '2차 대전기 영국 게이 군인들의 역사를 추적한 다른 유용한 참고 문헌을 얻을 수 있을까'였다. 이 책 자체는 픽션이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내용들을 가공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원사료 및 2차 사료를 포함한 연구서를 읽고 싶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McGowan이 사용한 참고문헌 목록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부록에 딸린 내용의 대다수가 RAF, POW 등의 약어 설명이 전부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는 힘이 쭉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쓸만한 (그리고 학술적인) 참고문헌 목록이지, 이런 약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위키에서도 찾을 수 있는 걸 glosarry라고 그럴듯하게 명칭까지 붙여서 첨부할 필요갸 있느냐며 투덜대기도 했다) 아마존 독자 리뷰를 가득 채웠던 '역사 고증이 뛰어나고 몰입감이 굉장하다'던 평가와 칭찬은 내가 찾던 종류의 '고증'과는 조금 성격이 달랐던 셈이다. 


시작은 어찌 되었든, 처음으로 킨들까지 사용해서 책을 구매했으니 그대로 방치하기에도 찝찝한 노릇이었다. 결국 밤에 잠들기 전이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즉 심심할 때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초반부~중반부까지의 감상은 '잘 쓴 Ao3 오리지널 팬픽'을 읽는 정도의 기분이었다. 기성 작가의 작품답게 문장이 쉽고 깔끔하며, 일단 기본적인 스타일이 잘 정돈되어 있었으니 영어공부 한다는 느낌을 내기에도 좋았다. 중간중간, 주인공 커플의 굉장히 전형적인 베드씬 묘사가 나올 때는 혹시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장르 분류가 게이 에로틱 로맨스인가 싶은 당황이 들기도 했다. (참고로 베드씬은 총 세 번 나오며, 각각 서로 다른 장소와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여준다) 독자 평가에서 그토록 칭찬하던 역사적 몰입감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주인공인 아티(Arty)와 짐(Jim)의 만남 및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서술되는 중반부까지는 비교적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겼다. '오랜만에 잘 쓴 연애소설 한 편 읽는다고 생각하자.' 이것이 당시에 했던 생각이었다. 



2. 그런데 이 소설,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흥미가 붙기 시작했다. 대략적으로 짚어보자면, 아티와 짐이 처음으로 강제적 이별을 겪는 1945년 파트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영 공군 소속 공병인 아티와 미국에서 파병된 짐은 부대 이동, 종전, 아버지의 부고 등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서 총 서너 번의 원치 않는 이별을 겪게 되는데, 그때마다 등장하는 당대 묘사들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당대인들의 세계관을 잘 짚어주고 있었다. (물론 나처럼 21세기를 사는 작가가 재현해낸 상상의 과거이기는 하지만.) 처음 이 점을 느낀 부분은 짐이 떠나고 홀로 민튼 기지(Minton)에 남은 아티가 신병을 훈련시키면서 느끼는 감상─뿌듯함, 동료애, 그러나 미처 숨길 수 없는 전쟁을 향한 본질적 회의감─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직후 이어지는 영국 폭격·전투기들이 비상착륙하는 과정의 실감나는 묘사, 그 과정에서 사고에 말려든 아티의 경험들이 점차 독서에 흥미와 긴장감을 더했다. 

특히 착륙 사고에 휘말리면서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은 아티를 향한 짐의 헌신적인 간병 장면이 예상치 못하게 내 심장을 툭 치고 들어왔다. 의사조차 회복 불가능할 것이라며 고개를 젓는 아티의 다리를, 짐은 묵묵한 손길로 정성스레 마사지해준다. 작중 아티의 절친한 친구로 나오는 진(Jean)과 찰리(Charlie)조차 영구적 장애를 입은 사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른 나머지 병실에서 도망치듯 나오는 가운데, 오직 짐만이 믿음을 갖고서 그를 돌본다. 아티의 어머니는 성장한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수발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 앞에서 (읽는 독자가 상처받을만큼) 적나라하게 난처한 반응을 보인다. 사실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면, 나라고 해서 진이나 찰리보다 더 나은 반응을 보이진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친한 친구나 가족의 영구적 부상은 크나큰 심리적, 물리적 헌신을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일로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짐이 보여준 깊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이 더욱 빛을 발한다. 현실 속에서 쉽게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놀랍고 숭고하게 느껴지는 지지와 헌신, '모범적인' 사랑의 표현이 말이다. 영화 <대니쉬 걸>을 보면서 남자 주인공이 받았던 게르다의 조건 없는 지지를 부러워했듯이, <When Skies Have Fallen>에서 짐이 아티에게 보여주는 헌신과 염려가 참 부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그 부러움이야말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잦은 감정적 대리만족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핵심 이유인 것 같다. 



3. 이처럼 읽는 독자가 부러워할 만큼의 헌신적인 사랑(그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하며 인내하고, 견디며 포용하는 모범적인 사랑의 현신이다!)이 짐 한쪽의 일방향적인 희생인 것은 아니다. 아티 또한 짐과의 성향 차이나 정치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툼이나 의심 한 번 없이 시종일관 그의 선택을 존중으로 지켜봐준다. 작중에서 "몽상가이자 사색가"로 묘사되는 아티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잘 인지하고 수용하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를 정치적 영역에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실천성이나 행동력은 적은 인물이다. (아마 당시 일반적인 동성애자들의 평균적 태도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와 반대로, 작중에서 종종 아티를 두고 "He is a dreamer and thinker..."라는 말로 놀리는 짐은, 본래 성격이 대담하고 솔직하며 겁이 적은 인물이다. 그는 처음 군대에서 아티를 만나 사귀게 되었을 때부터 '널 사랑한다고 세상에 외치고 싶어'라고 말하며 줄곧 자신의 사랑에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 짐의 담대한 면모에 끌리면서도 아직 세상에 맞서기엔 용기가 모자랐기에, 아티는 그저 잠깐씩 짐과 밀회를 갖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종전 이후로도 이어진다. 아티와 함께 살기 위해서 영국으로의 이민을 택한 짐은 연인인 아티 및 친구 내외인 찰리-진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그는 아티가 입원했던 병동의 수간호사인 메리(그녀 또한 동료 여군 다프네와 파트너 관계를 이룬다)와 함께 다른 저명한 동성애 인사들의 저서를 탐독하고, 런던의 다른 동성애자들과 연락망을 취하는 등의 토론, 행동 모임을 조직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저자는 1948년에 첫 출간된 <킨제이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짐과 수간호사 메리가 '동성애는 자연적인 성적 지향의 하나이며, 이 사실을 관철시켜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대목을 서술한다. 이 같은 짐의 적극적인 정치 태도는, 아티가 D H 로렌스의 소설에 간간이 나타나는 옛 시대의 친 동성애적 분위기를 회상하며 개인적 차원의 감상에 머무르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성적 지향성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주로 읽고 인용하는 서적의 종류를 통해서도 이들의 성격 차이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아티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대표되는 '문학'을 계속적으로 언급·인용하는 데 비해서, 평소 책과 거리가 멀었던 짐은 오히려 <킨제이 보고서>라는 두꺼운 사회학 보고서를 탐독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아마 동성애의 자연 보편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킨제이 보고서라는 장치를 사용한 것일 테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읽는 책의 비교를 통해서 두 인물의 성격차를 은근히 드러낸 방법이 세련되고 흥미롭다.) 


정치적 관철에 소극적인 아티와 적극적인 짐. 이 같은 성격 및 가치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티는 짐의 활동을 가로막지 않으며 조용히 지지해준다. 자신이 다리 부상을 당했을 때 짐이 병실 사람들이 던지는 불편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사지를 해주었던 것처럼, 아티 역시 짐의 다소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도전을 묵묵히 지켜본다. 



4. 상술했듯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적극적이었던 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사랑을 부인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바로 반동성애법이라는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1950년대, 런던 경시청은 기존에 있던 동성애 금지법의 시행을 강화하면서 "성적 방종"을 저지르는 사람들(=곧 동성애자들)을 체포, 취조, 수감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열을 올리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함께 댄스홀에 갔다가 꼬리가 잡힌 짐과 아티도 경찰의 냉담한 심문을 받게 된다. 이 심문 자리에서 짐은 파트너 아티와의 관계를 시인하고 사면받을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그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하고 혼자 수감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짐은 자신이 공공장소에서 익명의 남성 세 명과 "성적 방종"을 저질렀다는 거짓 자백을 함으로써 아티를 보호하고 혼자 18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동성애 성향 치료를 위한 의학 처방을 따르면 형을 감면해주겠다'는 법원의 타협안을 거절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고수하며 일 년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감옥 생활을 온전히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 (개인적으로는 전체 진행 중에서 가장 긴장하면서 읽은 부분이었다. 동성애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을 무작위로 체포해서 전기 쇼크/약물 투여/호르몬제 투여 등의 강압적 조치를 시행하다니,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가? 그러나 이 점은 단순히 작가의 상상이 아니며 다른 LGBT사 연구서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엄연한 (그리고 끔찍한) 역사적 현실이었다.) 


그리고 아티는 수감된 짐의 의도를 이해하며 18개월의 기간을 침묵으로 견뎌낸다. 이때 짐이 비밀리에 아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둘의 상호 신뢰를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Part 4, Loc 2765)

"시간이 별로 없지만, 그들이 날 감옥으로 데려가기 전에 이 편지를 보내야 겠어. 먼저 널 정말 사랑하고 네가 보고싶어 (...) 

아마 내일이면 너도 신문에서 내가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남자 세 명이랑 역겨운 외설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읽게 될 테지.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제발 믿어줘. 내가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유일한 사람은 너뿐이야. 

절대로 너를 향한 내 사랑을 부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널 안전하게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 (...) 

네가 자유롭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해. 당신 삶을 살아, 내 사랑. 나 없이 살아가줘. 

내가 널 그만 사랑하게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하지만 가능하다면, 제발, 부탁할게. 부디 날 사랑하는 걸 그만둬." 



5. 이상 간략히 서술한 줄거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2차 대전기 및 그 후의 50~60년대 영국 사회를 살았던 한 연인의 끝없는 헌신과 상호 신뢰에 관한 이야기다. 여느 연애소설에 감초처럼 등장하기 마련인 감질맛 나는 밀당, 갈등, 싸움, 화해 등은 최소한으로 등장할 뿐이며,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연대와 상호 신뢰다. 심리학자 아들러가 일전에 어느 책에서 '신용이 조건부 믿음이라면 신뢰는 조건 없는 믿음'이라고 했던가? 짐과 아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친구, 가족, 동료들이 맺는 관계야말로 바로 아들러가 말한 '신뢰'의 정의에 걸맞는 사례일 것이다. 이렇게 다툼 한 번 없이 시종일관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연인의 사랑이야기란 여느 통속 소설은 물론이고 현실 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 현실 연애에서는 성별을 떠나서 얼마나 갈등이나 오해, 치기 어린 감정 싸움이 넘쳐나는데? 그래서 소설이고, 이 책이 내 마음에 은근한 떨림을 주는 것이다. 두 인간 사이의 상호 존중과 헌신하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평하고 싶다. 

상술한 주제에 덧붙여서, 중반부부터 보다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하는 실감나는 시대 상황을 충분히 매력있게 픽션 속에 녹여냈다는 점에서, 저자의 저술 목표는 일단락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6. 이 포스트의 흐름이 보여주듯이, 나는 이 책을 처음에는 약간의 실망과 체념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서사가 주는 감동 및 저자가 곁들인 시대상(특히 1950~60년대 영국 동성애자의 삶)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비록 처음에 기대했던대로 학술적이고 유용한 참고 문헌을 얻지는 못했지만, 한 편의 울림 있는 (그리고 부러운) 이야기를 읽었으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영역의 배경지식을 한 걸음이나마 넓혔다는 점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짐과 아티의 후일담이 궁금한 독자를 위해서 간단히 뒷 이야기를 언급하자면, 짐이 석방된 해인 1955년부터 1967년까지 약 10년 간, 두 사람은 짐의 동생 조슈아의 도움을 받아서 저택에서의 은둔 생활을 유지하며 파트너십을 이어간다. 그리고 1967년 7월 29일, Sexual Offences Act의 통과를 계기로 영국에서는 기존의 동성애 불법화 조항이 법적으로 폐지된다. 더 이상 영국의 동성애자들은 동성과 성관계를 가지거나 성적 파트너십을 지속한다는 이유만으로 가택 수색, 심문, 체포, 수감, 강제 정신 치료 등의 부당한 국가적 폭력을 감내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물론 짐과 아티가 처음 만났던 장소이기도 한 '군대'에서의 동성애 합법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다시 33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67년의 이 변화만으로도 우리의 주인공 아티에게서 어떤 심경의 변화, 특히 내부적 용기를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법안이 통과된지 이틀 뒤, 어느덧 50대가 된 아티는 편지를 통해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자신의 성정체성 및 짐과의 파트너십의 진실을 고백한다. 


(Epilogue, 1967.07.29, Loc 2956)

"(...)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오늘은 제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더 이상 범법자가 아니게 되는 날입니다. 두 분께서도 신문을 통해 보셨을 테지만 (...) 매춘과 동성애(homosexuality)에 관한 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어요. 

혹여 착각하실까봐 덧붙이자면, 제가 그동안 매춘에 관여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평생동안 "오직 한 명의 사람"과 충실한 관계를 맺어왔으니, 미덕에 걸맞는 떳떳한 삶을 살아온 셈입니다. 우리는 만났고, 구애했고, 서로 사랑에 빠졌고, 자연이 허락하는 법(사실혼)에 따라서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이어왔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말이에요. (...)

지난 12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은둔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나라가 우리의 무죄를 선언했으니,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지요. (...) 우리는 역겹지도 않고, (사회를 좀먹는) 포식자들도 아니에요. (...) 우린 지금 모습 이대로 태어났고, 짐과 제가 나눈 사랑은 두 분께서 공유하셨던 사랑처럼 신성하고 진실되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누구도 헤어지지 않고, 누구도 시련 앞에서 무너지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꿋꿋이 인내하고 견디며, 마침내 변화하는 사회를 목격한다는 내용의 해피 엔딩. 이보다 이상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결말이 또 어디 있을까.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 한 켠이 시큰하게 아려오는 것은 결코 신파성 감상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 시대를 살았음직하고 건너왔음직한 이들의 삶이 머릿속에 선연하게 그려지는 탓이다. 




+) 덧붙임 하나. Loc 2519에 런던 대공습 당시 댄스홀의 풍경과 당대인들의 의연한 태도가 인상적이어서 그 부분을 요약하여 덧붙인다. 이처럼 디테일한 묘사와 현장성이야말로 저자가 의도한 역사적 몰입감을 더해준다. 

"런던의 Palais Dance Hall. 불쌍한 보초 한 명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공습 경보가 울리면 공연 중인 악단 쪽으로 달려가서 횃불을 쳐든다. 그러면 악단은 연주하던 곡을 멈추고, 그 즉시 'The Woodchopper's Bell' 같은 시끄러운 곡을 새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음악으로 공습 사이렌의 소리를 묻고, 댄스홀의 사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드러머는 귀가 멍멍해질만큼 스틱을 두드려대고, 그 덕에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폭발음이 가려지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춤을 출 수 있다. 

죽음의 목전에서 보란듯이 파티를 이어가는 이 같은 태도에서는 숨길 수 없는 생의 의지와 높은 사기가 느껴진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바로 이것이 하루 걸러 공습이 이어지던 44-45년 당시 런던 댄스홀의 풍경이었다. 

즉, 어린 보초 한 명의 손에 사람들이 계속 춤을 춰도 괜찮을지, 아니면 중단하고 대피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큰 책무가 주어졌던 셈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곳에 있던 모두가 젊고 어렸다. 랭카스터 파일럿들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을 웃돌았고, 함께 탑승하던 승무원들의 나이는 그보다도 더 어렸다."





+) 덧붙임 둘. 책 표지의 사진을 찾다가, 우연히 Vitnage Gay Photographs를 수집해놓은 블로그를 발견했다. 당시 동성애자들은 언제 경찰서로 (군인들의 경우에는 군사 법정)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주고 받은 편지나 함께 찍은 사진 같은 사적인 문서들은 대개 불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와중에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재발굴된 2차 대전기 동성 연인들의 사진이 일부 존재한다. 아래 간략히 실은 사진 또한 그렇게 보존되어 재발굴된 사진들의 일부이며, 자세한 출처는 사진이 게시된 블로그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

 출처: http://javilomax.blogspot.kr/2014/02/youve-got-friend-102.html

워낙 방대한 양이라서 개별 사진들의 원 출처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사진들이 촬영된 대략적인 시기는 양차 대전을 아우르는 20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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