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입니다. 타이핑하면서 느낀 것은 1) 5년 전 나는 썸타는 글을 쓸 수 있었다니! 2) 5년 전 나는 이렇게 길게 글을 쓸 수 있었다니!  신기하면서도 현재 원고에 부담을 느끼는 나의 모습과 비교가 되면서 약간 심란해졌습니다. 그때와 지금이 무엇이 달라졌기에?










사랑하는 레이븐,

지금쯤 런던에는 쌀쌀한 바람이 불고 대낮에도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덮는 계절이 돌아왔겠지? 이곳의 날씨도 별로 다르진 않아. 다만 런던보다 좀 더 거센 바람이 분다는 점이 다르겠구나. 살을 에는 듯한 이곳의 추위는 여러 겹의 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서지 않으면 손등이 허옇게 다 틀 정도야. 난 콘월을 제외하고서는 영국에서 이만큼이나 추운 곳을 본 적이 없어. 그래도 시골의 탁 트인 하늘은 긴 겨울의 위안이 된다. 낮에 올려다보는 이곳의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 한 점 없는데, 황량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색이 꼭 도화지에 물감을 쏟아 놓은 것 같아. 이런 추운 날씨만 아니라면 언제낙 너와 함께 와서 보고 싶은 풍경이기는 해.

인사가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 렌셔 저택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저택인데다가 안팎으로 통풍이 잘 돼서 추울 법도 하지만, 난 꽤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어. 여기 주인이 필요한 곳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지.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이곳에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던데 어디서 그만한 돈이 들어오는지 몰라. 아,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할 일 없는 한량이라는 뜻은 아니야. 렌셔 씨는 나나 다른 하인들 못지않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데다가, 매일 낮 시간 동안에는 외출해 있으니까 말이지. 추측하건대 다른 지주들처럼 사냥이나 파티 같은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처음 여기에 왔을 때 그를 두고 ‘한심하고 게으른 귀족 나리’일 거라고 단정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그는 성실한 사람이야. 이번만큼은 내가 특정 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판단한다던 너의 평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를 좀 해볼까? 며칠 전에 열네 번째 생일을 맞은 첫째 미하엘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편인 아이야. 그래도 친해지면 낯을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수다를 떨 수도 있는 학생이지. 그는 아버지를 아주 존경하고 있어. 얼마 전에 생일파티를 열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렌셔 씨가—그게 그 사람의 이름이야—젊을 적에 쓰던 고급 회중시계를 선물로 물려주니까 굉장히 기뻐하던 거 있지. 둘째는 제임스라고 하는데, 형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고 장난기가 있어. 물어보는 것에 대충 대답해줬다가는 나중에 큰코다치게 되더라고. 그래도 그 애는 영리해. 특히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은데, 나로서는 가르치기 편하지. 그리고 아마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여기서 글이나 수학 말고도 체육이나 음악도 함께 가르치고 있어. 기숙학교에 다니진 않더라도 일단 남자아이들이라 체력단련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대시 맡고 있는데, 솔직히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움직이는 것보다는 학문의 길을 가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으니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렌셔 씨는 만족하고 있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그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수업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런던에서라도 책을 구해다 줄 정도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는 매일 저녁마다 서재에 아이들을 불러 놓고 외국어로 된 책을 읽어주기도 해. 그걸 볼 때마다 저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더 근사한 발음과 억양으로 읽어주는 것을 좋아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제임스가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를 때마다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렌셔 씨를 보고 있으면 세상에 그보다 더 다정한 아버지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겉보기에는 무뚝뚝해 보일지 몰라도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는 없을 거야. 네게도 그를 보여주고 싶지만 이 집에는 그의 초상화 한 점 없으니……



여기까지 쓴 찰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쓰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쓴 것을 쭉 읽어봤다. 역시 지나치게 렌셔 씨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별다른 이야기를 쓴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레이븐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감이 좋은 여동생은 무심히 쓴 문장 하나에서도 그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찰스는 몇 번 더 읽어보아도 마음에 차질 않아서 쓴 것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새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펜에 잉크를 묻혀 다시 천천히 글을 써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두 번쯤 그 짓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채 반도 채우지 못한 종이를 꼬깃꼬깃 구겨서 휙 던져버렸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뒹구는 종이뭉치가 자기 처지만큼이나 처량해 보였다. 마치 지난 몇 주 동안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요 근래 그는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정욕에 빠진 삶을 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씻으러 갈 때부터 간밤의 정사로 인한 나른함에 시달렸고, 대낮에도 틈만 나면 음란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며 심지어 아이들과 정원의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 남자의 물에 젖은 몸을 떠올린 적까지 있었다. 그때 찰스는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소리도 못 느끼고 한낮의 공상에 몰두한 중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둘째 제임스가 몰래 나무통에다 물을 담아 멍하니 있던 찰스를 뒤에서 급습했고, 졸지에 물세례를 맞은 그는 발을 헛디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도 행여 수업에 쓰라고 렌셔 씨가 사다 좋은 책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시내의 작은 서점에서 꼼꼼히 그 내용을 살피며 책장을 넘겼을 길고 곧은 손가락이 연상돼서 얼굴에 절로 열이 올랐다. 어둠 속에서 귓가를 살살 쓰다듬어오던 그의 손가락이 생각난 탓이다. 사소한 물건 하나, 지나치는 풍경 하나하나가 렌셔 씨―에릭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찰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손바닥도 둘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그들의 위험한 밀회는 에릭의 암묵적인 동의가 없었더라면 이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비록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유혹은 아니었지만 홀로 뜰을 거닐 때면 느껴지는 인기척, 의례적인 대화들 사이로 은근히 흘리는 말들, 나란히 걷다가 스치는 손길 같은 것들이 많은 것을 말해줬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청회색 눈동자를 들여다 볼 때마다 찰스는 매번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아닌 듯, 꾹 다문 입술 옆으로 살짝 주름이 질 때면 그의 심장도 함께 뛰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때때로 성급한 열정이 그 신중함마저 집어삼켰다. 하루는 에릭이 일찍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마침 미하엘과 제임스를 데리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던 찰스는 저 멀리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먼저 집으로 들여보냈다. 둘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두서없는 얘기들을 나누는데, 처음 키스했던 산책로를 지나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옷소매 아래로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느꼈는지 에릭 역시 조용해졌다. 그로부터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두 사람은 장미 덤불 사이에 숨겨진 벽돌담에 기대서서 그때의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이전처럼 순수한 경애의 키스가 아니라 좀 더 농밀하고 위태로운 짓을 했다는 점이 달랐는데, 좁은 공간에서 밀착해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몸에서 열이 올랐다. 눈을 감고 찰스의 허리께를 만져오던 에릭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 당연했다. 잠깐 당황하는 듯싶던 그는, 그러나 곧 찰스를 돌려 세우고 그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처럼 점잖은 신사가 어디서 그런 짓을 배워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에릭이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찰스의 바지춤을 끌러냈던 것이다. 반쯤 선 앞섶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에릭은 미처 찰스가 갑작스런 행동에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둥근 끝부분을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한 손으로 뿌리를 잡고 입술로 기둥을 문지르기만 하는 수준이었던 그 행위는 애무를 받는 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수록 격해져서, 나중에는 거의 목젖 끝에 닿을 정도로 삼키고 강하게 빠는 정도가 되었다.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고 질척한 소리를 내며 기둥을 죄이는 것이 꼭 여인의 음부를 연상케 했다. 민감한 곳에 주어지는 자극을 견디지 못한 찰스가 자신도 모르는 새 허리를 앞뒤로 흔드는데도, 그는 오히려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찰스의 물건을 머금었다.

정원의 숨겨진 공간에서는 한 명분의 신음만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상의가 까칠한 벽돌에 긁혀서 헤지는 것도 모르고 헐떡이다가 아래를 내려다 봤는데, 눈을 내리깐 채로 열과 성의를 다해서 자신의 것을 위로하고 있는 에릭이 보였다. 그것을 목격한 순간, 찰스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 안에 터뜨려버렸다. 물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놀라서 얼른 성기를 빼내려고 했지만, 상대방이 놔주지를 않았다. 에릭은 찰스가 엉덩이를 빼지 못하도록 꽉 잡은 다음에 목 안쪽으로 쏟아지는 것을 전부 삼켰다. 잘 넘어가지 않는 듯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느리게 꿀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이 빠져서 흘러내린 바지를 추스르지도 못하고 서 있는 찰스에게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옷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밀회가 주는 쾌락도 순간일 뿐, 찰스는 얼마 안 가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에릭 렌셔는 한낱 약사의 아들인 자신과 달리 좋은 가문의 어엿한 가장이었다. 비록 영국 태생은 아니지만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한 번 그를 보기만 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는 벌써 아들을 둘이나 둔 결혼한 남자였다.

‘어차피 죽어버린 아내인데 무슨 소용이란 말야?’

그런 대담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어린 형제를 바라볼 때면 그런 뻔뻔함은 다시 꼬리를 접고 들어갔고, 죄책감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로 찰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그저 당장의 권태를 달래기 위한 한낱 여흥거리인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담담하고 차분한 눈으로 자기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을 통할 때를 제외하면 밝은 대낮의 에릭은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이 말수가 적은 주인일 뿐이었다. 먼저 육체적인 권유를 해오는 적은 있어도 달콤한 언약을 속삭이는 적은 없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해주기 마련인 베갯머리송사조차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 기대오는가 싶으면 다시 모른 척 뒷걸음쳐 간다. 찰스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른 모든 평범한 사내들이 그렇듯이 찰스 역시 남성과 진지한 사이가 되는 것은 처음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상당한 각오를 하고 몸을 던진 것인데, 날이 갈수록 어쩌면 자신이 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나?”

의자에 앉은 채로 상념에 빠져 있던 찰스가 무심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이라고? 그는 자신이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참으로 순진한 행동이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본질적으로 에릭과 자신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계약관계였다. 렌셔 씨의 서명 하나에 언제든지 해지될 수 있는 그런 관계. 당장 내일에라도 구겨진 편지지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랑을 꿈꾸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찰스는 자기 자신을 냉소했다. 그렇게 하면 쓰라린 가슴이 조금 나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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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찰스의 이런 고민은 의외의 사건을 계기로 풀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까지 정확히 삼 주 앞둔 날이었다. 한 달 전에 기부금 문제로 저택을 방문했던 맬컴 목사가 다시 저택을 찾았다. 이번에는 마침 렌셔 씨가 집을 지키고 있던 터라, 목사는 헛걸음 하는 일 없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목사는 렌셔 씨에게 내년에는 올해보다 5% 증가한 금액을 기부해 주십사 부탁했는데, 렌셔 씨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인 렌셔 가의 기부금은 교회와 지역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재원이었고, 다행히 관대한 젊은 주인은 이런 일에 있어서는 씀씀이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런 태도는 독일 출신의 이방인이었던 그를 마을 사람들이 지역의 유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무사히 일을 성사시키고 점심식사에까지 초대받은 목사는 흐뭇한 얼굴로 차를 들었다. 이 집 요리사의 요리솜씨가 좋다는 것은 예전부터 자주 전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직접 맛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훌륭했다. 게다가 모처럼 집에 사람이 복작거려서 마음도 덩달아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렌셔 씨는 비록 즐거운 말상대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맬컴 목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줄 정도의 인내심은 있는 사람이었다. 심적인 여유가 생긴 맬컴 목사는 이것저것 마을의 이야기라든가 교회의 내부사정 같은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렌셔 씨에게 한참 성탄절 준비와 연말 계획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에 응접실 한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찰스가 들어왔다. 젊은 가정교사를 보자, 목사는 한 달 전에 그 청년에게 넌지시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이전에 보니까 자비에 씨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던데, 혹시 성탄절에 연주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오르간 반주를 맡았던 젊은이가 하필이면 지난달에 손목을 다쳤지 뭡니까. 성탄절 당일까지 낫기 어렵다는 데다가 당장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데, 올 수가 없으니, 원……”

그렇게 말하면서 목사는 사실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 부탁을 해봤으나 찰스가 렌셔 씨의 허락 없이는 결정하지 못한다고 하기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첨언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에릭이 찰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허락만 하신다면야 저는 괜찮습니다. 곤경에 빠진 목사님을 도우는 것도 주님의 어린양의 미덕이겠지요.”

그렇게 성탄절 아침 미사에서 성가대를 도와 찰스가 반주를 맡기로 결정됐다.

연습은 승낙이 떨어진 바로 그 주부터 시작됐다. 일주일에 두 번씩 찰스는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서 마을의 교회로 달려갔다. 에릭은 아이들의 수업시간 중에서 두 시간을 빼서 그에게 연습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친절에 부담을 느낀 찰스가 두 시간분의 봉급을 제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고 의견을 내비쳤지만, 에릭은 손사래를 치며 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잘한 글자를 들여다볼 때 사용하는 안경을 코에 걸친 채로, 장부에 열중해서 길게 얘기를 하지도 않고 한 번에 잘라내는 모습에 찰스는 조금 상심했었다.

그가 연주할 곡은 총 다섯 곡이었는데, 그 중에는 성탄절 아침마다 의례적으로 연주하게 되어있는 <오, 위대한 신비 O Magnum Mysterium>라는 곡이 포함돼 있었다. 이천 년 전, 순결한 처녀의 몸을 빌려 태어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노래는 대개 지역의 가장 실력 좋은 여가수가 독창을 맡게 돼 있는데, 올해는 레이첼이라는 이름의 젊은 아가씨에게 그 몫이 돌아갔다. 고운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그녀는 이 지역에 사는 젊은이들이라면 다들 한 번씩은 무도회에서 춤을 신청해보려는 숙녀였다. 물론 찰스는 렌셔 저택에 도착한 뒤로 마을에는 거의 출입하지 않은 탓에 이런 뒷사정에 밝지 못했고, 따라서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마을 청년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레이첼이 렌셔 저택의 신출내기 가정교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첫 연습이 있던 날, 마침 그 해의 첫 눈이 내렸다. 날 찰스는 막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연습에 늦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레이첼 양은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 위에 흰 눈송이를 뒤집어쓰고서 교회로 들어오던 청년을 본 순간 그에게 연정을 품었다.

그녀가 보기에 찰스는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부류의 사람이었다. 렌셔 씨가 특별히 돈을 얹어주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도는 젊은 청년한테서는, 확실히 도시 출신다운 세련됨이 풍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귀족 출신인 것은 아니지만, 대학까지 나왔다고 하니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실 평민이 그 정도 교육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정확하게 구사하는 옥스퍼드 억양, 꼭 필요한 어휘만을 사용해서 말하는 습관, 그러면서도 사교를 위해 재치 있는 농담 몇 마디를 던질 수 있는 정도의 센스는 시골의 어설픈 동년배 청년들만 보면서 살아온 레이첼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찰스는 그녀의 사회적 위치와도 그럭저럭 맞는 상대였다. 비록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요새 같은 세상에 어디 중산계층이라고 못 사는 법이 있던가? 지금은 부유한 귀족의 가정교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그와 함께 도시로 나가면 그녀에게도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역시 찰스의 외모였다. 보석을 박은 것처럼 빛나는 눈동자, 부드럽게 굽이치는 갈색 고수머리, 둥그렇게 처진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강단 있어 보이는 눈매, 희고 혈색 좋은 피부. 모든 면면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끔 잘생긴 얼굴 뒤로 소년 시절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비칠 때마다 숨기기 어려울만큼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는 별 생각 없이 건네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조차 심오한 의미를 품고 다가왔다. 떠받들어 주는 무리 때문에 다소 오만해진 감이 있긴 했어도, 그녀의 본바탕은 아직 순진한 시골 아가씨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레이첼에게는 안타깝게도 찰스 자비에는 그녀가 주는 것만큼의 애정을 돌려주진 않았다. 우선 그에게는 여동생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한눈팔지 말고 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다급한 목표가 있었기에 아가씨들한테 신경 쓸 틈이 없었던 데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연애 세포는 최근에 연이어 벌어진 에릭과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오롯이 그쪽으로 쏠려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머릿속에는 레이첼의 발자국이 약간이라도 디딜 틈이 없는 셈이었다. 대학 시절의 명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는 마치 수도승처럼 그녀를 대했다. 예의는 지키되 불필요한 선을 넘지는 말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연애상열지사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이 당사자의 본의와는 전혀 상관 없이 두 남녀에 관한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이렇게 좁은 동네에서는 별것 아닌 일을 두고도 수군대기 마련인데, 특히 젊은 남녀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기 마련이다. 평범하고 반복적인 하루를 살아가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가수와 도시에서 온 젊은 청년 사이의 열애담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외딴 렌셔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까지도 ‘우리 댁 선생이 여기서 신붓감을 고를지도 모른다는데?’, ‘나이도 비슷한 선남선녀이니 못할 것도 없지’ 같은 얘기들을 심심찮게 떠들고 다니게 되었다. 자기가 모시는 집안에서 경박한 소문이 도는 것을 참지 못한 집사 랜돌프가 하인들에게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그리하여 소문은 렌셔 씨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찰스가 교회에 가 있는 사이에 대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둘째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단 둘이서 정원을 걷고 있는 중에, 제임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해온 것이다.

“이제 선생님 못 봐요?”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선생님이랑 레이첼 누나가 결혼할지도 모른대요. 그럼 선생님이 우리 집에서 나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염려가 잔뜩 묻어있었다. 제임스의 이야기를 듣고도 별 반응이 없던 렌셔 씨는, 나중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 되어서야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돼.”라며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이렇게 사실무근은 소문이 온 마을을 휩쓰는 사이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서, 드디어 성탄절 당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마을의 하나뿐인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리 와서 리허설을 마치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찰스는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서 그는 특별히 꽤 그럴싸한 예복도 차려입었는데, 갖고 있는 옷 중에서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사실 찰스는 웬만한 일에는 별로 떠는 법이 없고 오히려 대범한 편에 축하는 성격이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게다가 오늘은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올 예정이었다. 자신들의 선생님이 성탄 미사에서 반주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형제는 성탄절 훨씬 전부터 그에게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대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찰스는 모처럼 들뜬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일 년에 한 번뿐인 행사에 아이들까지 참석하는데 당연히 에릭도 같이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사랑에 빠진 애송이마냥 그 사람의 출현 하나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꼴이 좀 한심해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왕이면 에릭과 아이들 앞에서 훌륭하게 연주를 끝마치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었다.

“찰스? 목사님께서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하시래요.”

예배당 뒤쪽의 대기실에 앉아 있던 찰스는 레이첼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그렇게 전하면서 응원하듯이 살포시 미소를 보냈지만, 기대했던 반응을 얻진 못했다.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 그녀가 흠모하는 청년은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만 한 번 까딱하고는 그대로 대기실을 나섰다.

예배당의 전면에는 대리석으로 세공한 제단이 있어서 목사나 교구장은 그 위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모든 교회 축일 중에서도 성탄절은 가장 중요한 행사에 속하는 터라, 맬컴 목사는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검은 옷 대신 황금색 실로 수가 놓인 예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조야하지도 않을 정도의 장식이었다. 영국 성공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 아담한 교회 곳곳에서는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물과 아름다운 성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제단 뒤편에 위치한 오르간 역시 그런 작은 사치 중에 하나였는데, 연주대 바로 뒤에 가림막이 설치돼 있어서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야 겨우 연주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목사가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기도를 읊는 동안에 찰스는 살짝 감았던 눈을 뜨고서 가림막 사이로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을 살폈다. 맨 앞줄에 앉아서 눈을 감고서 기도 중인 에릭과 아이들이 보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려니 지루해졌는지, 제임스가 자꾸 발을 꼼지락 거리는 것이 보여서 찰스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 했다.

마침내 회중의 ‘아멘’이라는 합창과 함께 기도가 끝났다. 찰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서 무거운 페달을 밟았다.

은은한 오르간의 울림과 성가대의 합창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예배당 곳곳을 울렸다. 아치형 천장에 음이 부딪히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각양각색의 화음을 맞추며 흘러가는 선율은 독실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 그 음악을 들으면 성스러운 마음이 샘솟을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특히 독창을 맡은 레이첼 양의 노래는 음악에 조예가 얕은 사람이라도 그 훌륭함에 탄복할 만큼 심금을 울리는 솜씨였다. 풍부하면서도 청량함을 겸비한 목소리로 그녀는 낮게 깔리는 반주에 맞춰서 연이어 네 곡을 선창했다. 등을 돌린 자세여서 사람들의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연주대에 달린 작은 손거울에 비치는 맬컴 목사의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만족스러운 연주였음이 분명했다.

어느새 마지막 곡을 연주할 차례가 됐을 때였다. 성탄을 기리기에 가장 알맞은 곡의 첫 선율이 시작되었다.

크나큰 신비와 경이로운 성사여

구유에 누워계신 신생의 주를 뭇 짐승이 바라볼지니

복된 처녀여, 그 품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수태하기에 합당하였도다

레이첼의 노래에 맞춰 건반을 누르려던 찰스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가사의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은데, 어디였는지 정확히 짚기 어려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부분인지는 집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연습하느라 이미 수없이 들어본 곡이 왜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전혀 모를 일이었다. 복된 처녀여, 그 품은…… 수태하기에 합당하였도다……

그는 열심히 손을 놀리면서 순간적으로 스치고 간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미처 이유를 밝혀내기 전에 먼저 노래가 끝났다. 예배당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잔음이 사라지면서 여기저기서 감탄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고, 그 바람에 찰스도 궁금해 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단 위로 올라간 찰스는 빽빽한 이낲 가운데서 에릭을 찾아보려고 길게 목을 뺐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는데, 저 멀리서 인파를 헤치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찰스는 가벼운 동작으로 단을 폴짝 내려가서 그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에릭은 재단이 잘 된 감색 프록코트를 입고 머리에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멋진 차림새였다. 그는 아직 공연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달아오른 찰스의 얼굴을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얇은 입술이 들리면서 그 틈새로 고른 치열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본 찰스는 인사를 하려던 것도 잊은 채로 정신이 멍해졌다. 찰스의 주의를 다시 환기 시키기 위해서 에릭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야 했다.

“굉장히 멋진 연주였습니다. 이렇게 잘 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부탁해 볼 걸 그랬군요. 거실에 있는 피아노에 먼지가 쌓인 지 오래됐는데 말입니다.”

에릭의 칭찬을 들은 찰스는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면서 점잖게 답했다.

“좋게 들으셨다니 기쁩니다. 사실 목사님한테 붙들린 것도 제임스와 미하엘의 부탁으로 그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였죠.”

그렇게 말하면서 찰스는 에릭의 옆에 서 있는 아이들을 향해 찡긋 눈짓을 보냈다. 제임스와 미하엘의 작은 얼굴 위로도 씩 작난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그것을 본 에릭이 낮게 웃었다. 자주 듣기 힘든 소리에 찰스는 이번엔 정말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러나 에릭의 짧은 웃음을 끝으로 대화는 곧 끊겨 버렸고, 갑자기 내려앉은 침묵에 찰스는 어찌해야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나?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와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탁 짚었다. 맬컴 목사였다.

“아, 여기 있었군요, 자비에 씨! 오늘 참석한 교구민들이 정말 아름다운 음악이었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어요. 주교님도 굉장히 흐뭇하게 들으셨답니다. 어서 이리 와서 인사들 나누세요. 잠깐 괜찮겠지요, 렌셔 씨?”

예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한 연주에 몹시 만족한 목사는 미처 에릭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찰스를 끌고 가 버렸다.

사실 목사가 직접 끌고 가지 않았더라도 저만치에서 찰스를 기다리고 있는 무리를 보면 누구라도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릭은 멀어지는 찰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선생은 평소에 즐겨 입는 간소한 셔츠와 목면으로 짠 바지 대신, 꽤 많은 돈을 주고 맞췄을 것이 분명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질 좋은 양모로 짠 코트의 뒷자락이 펄럭였다. 찰스는 그와 악수를 나누려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자한 얼굴로 아름다운 찬송을 만들어 낸 청년과 여가수를 칭찬하는 주교,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맬컴 목사, 그리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도 몰래 청년의 옷깃을 잡는 아가씨. 에릭은 말없이 그 풍경을 응시했다.

찰스는 정신이 없었다. 우선 연로한 주교의 칭찬과 그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맬컴 목사의 띄워주기에 송구스러워졌고, 자꾸 자기 옷깃을 잡아오는 레이첼 양의 손길이 부담스러웠다. 주교와 목사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만약 지나가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괜히 소문을 더 확대하는 꼴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예배당 안에는 자신들 네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서로 안부를 묻거나 찰스 옆을 지나가면서 인사치레를 던지기도 했기 때문에, 찰스는 주교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동시에 그들에게도 눈짓으로 답례해줘야 했다. 아까 미처 끝내지 못한 에릭과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도저히 그를 찾아갈 틈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목사가 그의 반주와 레이첼 양의 노래가 얼마나 조화로웠는지에 대해 찬양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찰스는 이 지루한 대화가 끝나면 에릭에게 가서 어떻게 말을 걸어볼지 이리저리 머릿속으로 가상의 대화를 굴려보았다. 조바심이 나고 찝찝한 마음 때문에 자꾸만 아까 에릭이 서 있던 것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인파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을 사람을, 찰스는 상상했다.

반시간이 지난 후에야 찰스는 겨우 목사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얼른 짐을 챙겨들고 에릭과 아이들이 앉아있던 자리로 가보았지만, 그들은 벌써 가버리고 없었다.

혼자 터덜터덜 렌셔 저택으로 돌아온 찰스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응접실에 앉아 있는 에릭을 발견했다. 뒤늦게서야 문 여는 소리를 듣고 찰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에릭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것을 감지한 찰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찾으러 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먼저 와 계셨네요.”

의뭉스럽게 말을 건네자, 에릭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바닥에 널려 있는 책들을 줍더니 하나씩 줄을 맞춰 책장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찰스한테서 등을 돌린 채로 대답했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보이길래 먼저 돌아왔습니다. 제임스가 오랫동안 앉아있느라 다리가 저렸는지 투정을 부려서요.”

옆에 앉아 있던 제임스는 그 말을 듣고 억울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찰스 역시 그 변명을 알아차렸지만, 그냥 못 본 척 했다. 대신 여상하게 에릭을 떠보았다.

“아직 점심을 들지 않으셨으면 대신 준비하라고 전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미안하지만 오늘 식사는 함께 하지 못할 것 같군요. 저녁까지 토지 관리인에게 보낼 서류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마디만 던져두고 에릭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찰스는 오랜만에 집사 랜돌프와 함께 부엌에서 점심 식사를 들었다. 집사는 찰스가 전한 이야기를 듣더니, 토지 관리인이 저택을 방문하려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왜 주인님이 벌써부터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찰스는 그 이유가 쉽게 짐작 갔지만, 그냥 모르는 척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애꿎은 아이들 핑계까지 대다니 그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찰스는 별로 에릭을 변호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허술한 핑계를 댈 정도로 자기를 피하고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괘씸해진 탓이었다. 덕분에 아침까지만 해도 설렜던 찰스의 기분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까 교회에서 봤을 때만 해도 먼저 나서서 찰스의 연주를 칭찬했던 데다, 좀처럼 보기 힘든 웃음을 보여주기도 했으면서 왜 한 시간 만에 동전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건지.

귀족이란 참으로 이기적인 족속들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들은 원할 때 부르고 필요가 없어지면 내친다. 짧은 하루 동안에만 몇 번이나 마음이 바뀌어, 쉽게 사람을 버리고 그로 인해 상처 받는 이들의 심경 따위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다. 모든 상심과 좌절은 남겨진 이의 몫인 것이다. 찰스는 마치 영문도 모른 채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라도 된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찰스는 에릭이 자신에게 보냈던 호의가 사실은 선심 쓰듯이 던져준 것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에릭을 찾아가서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행여나 그런 짓을 했다가 혹시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약간의 애정과 관심마저 모두 잃어버릴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언제 갑자기 내쳐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다짐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는데, 오늘의 자신은 가는 끈이나마 놓지 않으려고 애처롭게 매달리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경계할 만큼 냉철하던 자신의 이성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여 원망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원망한다. 그런 모순이 꼭 여자들이 읽는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찰스는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차라리 에릭이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둘러대줬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랬으면 이렇게 되도 않는 불안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 ⁕ ⁕


자꾸 밖으로 놀러 나가려는 둘째를 붙잡아놓고 한참 작문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파파 때문에 삐지셨어요, 선생님?”

찰스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질문에 자기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뭐?”

그는 쥐고 있던 깃펜이 손에서 툭 떨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임스가 대신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펜을 주워주면서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파파는 원래 불리해지면 아무 말도 안 해요. 나랑 미하엘한테도 그러는걸요. 전에도 선생님이 레이첼 양이랑 결혼하면 도시로 가버리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면서 혼났어요.”

그러니 파파가 조금 못되게 굴어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아이는 어른 흉내를 내면서 충고했다. 꼬마의 작은 손에 쥐어진 펜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혹시라도 파파 때문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떠나버릴까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파파도 좋지만 그렇다고 찰스 선생님이 떠나도 된다는 건 아니야. 이왕이면 파파도 선생님도 다 있는 게 좋지.’

작은 머리통 안에서 열심히 굴러가는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여서 찰스는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이들은 항상 가장 심각한 고민도 눈 깜짝할 새에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허리를 굽혀 제임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버지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체스를 두면서 아이들과 놀아주던 찰스는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얘들아, 이제 그만 자러 가야지. 벌써 열 시야.”

그렇게 살살 달래면서 체스 말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미하엘과 제임스가 간절하게 매달렸다. 아이들은 모처럼 아버지의 감시도 없는 참에 밤늦게까지 거실에서 뒹굴 예정이었는데, 작은 꼬마들로서는 소중한 자유 시간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보다도 더 올망한 눈을 하고 달라붙는 어린 형제의 손길이 찰스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어린애들은 원래 일찍 침대에 들기 싫어하기 마련이라는 걸 잘 알고 있던 그는 갈등에 휩싸였지만, 결국 마음을 다잡으면서 옷자락을 쥐고 있는 둘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체스는 다음에 또 두자, 응? 오늘 밤에는 선생님도 할 일이 있어서 안 돼.”

“응, 조금만 더요, 네에?”

조곤한 설명에도 아이들은 한동안 말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심란해지려는 무렵, 구원의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집사 랜돌프였다.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고 있다니, 주인님께서 아시면 경을 칠 일입니다, 도련님들! 찰스 선생님도 밤에는 선생님의 일을 하셔야죠. 자, 어서 2층으로 올라가세요!”

호통 치며 떠미는 집사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아이들은 입을 삐죽 내밀고 미적미적 걸음을 옮겼다. 찰스는 너무 안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계단을 오르는 아이들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줬다. 그렇게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집사에게 잘 주무시라는 인사까지 남긴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러 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다. 그렇게 그는 어두워진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는 깜깜했지만 분명 아직 불 켜진 방이 하나 있을 것이었다.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랜돌프인가? 들어오게.”

안에서 들려오는 허락에 찰스는 거칠 것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안에 있는 주인이 자신을 집사로 착각했다는 사소한 사실 정도는 가뿐히 무시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에릭은 소파에 앉아 심드렁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역시 바쁘다는 말은 핑계였다. 심통이 난 찰스는 일부러 조금 목소리를 키웠다.

“제가 방해가 됐나요?”

그 말에 이쪽은 확인하지도 않고 책만 보던 에릭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이의 방문에 놀랐는지 그는 잠깐 말문을 열질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뭔가 할 이야기라도……?”

찰스는 여전히 그의 딱딱한 태도에 불만이 차오르려고 했지만, 어차피 처음 당해본 것도 아닌데 어쩔 것인가,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신 예의를 차리는 말은 전부 떼어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제임스가 저와 렌셔 씨가 싸운 게 아닌지 걱정하더라고요.”

에릭의 어깨가 굳는 것이 보였다. 그는 삼 초 정도 침묵하다가 간신히 할 말을 찾은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으니 아버지께 여쭤봐야겠다고 해줬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찰스는 에릭의 반응을 살폈다. 제임스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그는 불리해지면 입을 다물었다. 입술이 일직선으로 다물리면서 높게 솟은 광대가 좀 더 도드라졌다. 인상을 써도 잘생긴 얼굴이라서 홀릴 뻔했지만 찰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임스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혹시 내가 섭섭하게 한 점이 있다면 속 시원히 털어놔 줬으면 합니다.”

아마 말하는 본인도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을 터인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가 괘씸했다. 찰스는 결국 화내듯 속마음을 털어놔 버리고 말았다.

“아까 왜 인사도 없이 먼저 가셨어요? 저는 한참을 찾아다녔는데.”

“……아까 말했잖습니까. 제임스가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려서……”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치고 들어오는 찰스의 반박에 에릭의 모양 좋은 눈썹이 꿈틀했다. 일개 가정교사가 대저택의 주인에게 말대답을 하다니, 대담한 행동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큰 소리를 듣고 짐 싸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찰스는 아까전 제임스의 한 마디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잠시라도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설마 그렇게 쉽게 내치지는 않겠지. 게다가 자꾸만 회피하려는 그의 태도를 보고 있으려니까 차곡차곡 쌓인 상처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새 그는 빈정거림을 가득 담아 가시 돋친 말을 던지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제가 대신 말해볼까요? 저 같은 무지렁이는 이제 질리신 거죠. 한 번 상대해 줬을 뿐인데 자꾸 들러붙으니까 귀찮아졌습니까? 하지만 렌셔 씨, 전 심심할 때 한 번씩 건드려보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쉽게 손댔다가 버려도 되는 창부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른 방탕한 귀족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사람을 잘못 봤던 걸까요? 그동안 얼마나 가벼운 생각으로 절 상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렌셔 씨, 저는 사람이지 당신이 내킬 때마다 즐거도 되는 한낱 여흥거리가 아니……”

그러나 나머지 말은 뒤이어 들린 큰 소리에 묻혀버렸다. 에릭이 몹시 화가 난 표정을 하고서 소리쳤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쾅, 책상이 울렸다. 속사포처럼 서러웠던 걸 쏟아내고 있던 찰스도 그 노기 띤 울림에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그는 한 번도 에릭이 큰 소리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대로 험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닐까 싶을만큼 분위는 험악해져 있었다. 어쩌면 그냥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귀족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돌처럼 굳어버린 찰스를 두고서, 에릭은 한숨을 쉬면서 책상을 쳤던 주먹을 내려놨다. 그리고 초조한 듯이 뒷짐을 지고 방안 을 돌아다녔다. 그건 지독한 혼란에 빠진 사람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 이상한 행동에 찰스는 결국 다시 한 번 자세히 그를 살펴봤다. 그랬더니 화를 내는 줄 알았던 에릭은 사실 상처받은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크나큰 상심을 당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을.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찰스는 아까의 기백을 잃어버리고 당황해서 입만 달싹였다. 차라리 화를 낸다면 이해하겠는데 왜 저렇게 서러운 눈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젊은 청년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 에릭은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열기 때문에 거칠어진 목소리로 고백했다.

“나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당신을 한낱 여흥거리 따위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진력이 다한 사람처럼 뒤에 있던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찰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결국 에릭은 멍하니 서 있는 젊은 선생을 위해서 한 번 더 자세히 설명하는 수치를 무릅써야 했다. 그건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신을 교회에 두고 혼자 와버린 것은 견디기가 힘들어서였어요. 다른 나쁜 뜻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다만 계속 보고 있기가 어려워서……”

“어떤 것을요?”

순진하게 물어오는 젊은이의 태도에, 렌셔 가의 가주는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질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 곤혹스러운 듯이 축 처진 눈썹과 살짝 내리깐 눈매가 어린 송아지를 닮아 있었다.

‘짐승과 송아지라, 굉장한 조합이야.’

새로운 발견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누르면서, 찰스는 재촉하듯이 밀어붙였다. 결국 에릭은 궁지에 물린 죄인처럼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그…… 같이 있던 아가씨…… 그 여자가 붙잡고 있길래……”

“레이첼 양이요?”

옅게 달아오른 얼굴이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망해하는 에릭이 무안하게도 젊은 가정교사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요.”

아, 이건 확실히 자신이 말했으면서도 놀라운 발언이었다. 그렇게나 조심하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인정해 버린 것이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찰스는 할 말을 못 찾고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는 에릭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앉아있는 그를 위해 무릎을 굽혔다. 그 바람에 책을 읽으려고 소파 옆에 놓아두었던 초가 떨어질 뻔했지만, 어느 누구도 움직이진 않았다. 방심한 채로 열려 있던 입술이 또 다른 뜨거움으로 덮이고, 검은 동공이 넓어졌다. 아무런 반응이 없길래 잠깐 눈을 떴던 찰스는 굳어있는 에릭의 표정을 보고서 살짝 얼굴을 뒤로 물렸다.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이었다. 그는 에릭의 코와 자신의 코를 바싹 맞대고 속삭였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영리한 사람이니 생략된 말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찰스는 굳이 소리 내어 입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내 보드라운 혀가 얽혀들었다.




챕터 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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