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배포본 <하늘은 한 권의 책이었다>에 실었던 마지막 단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쓰면서 즐거웠던 글이어서 웹에도 공개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또 즐겁게 읽어주시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u_u♡♡♡









My heart’s in the Highlands, my heart is not here

My heart’s in the Highlands, a-chasing the deer

Farewell to the Highlands, farewell to the North

Farewell to the mountains high cover’d with snow

Farewell to the straths and green valleys


내 심장은 하이랜드에 있으니, 안녕 북쪽이여, 눈 덮인 언덕이여, 푸른 계곡이여.

내 발이 어느 땅 위를 걷고 있어도 내 심장은 영원토록 사랑할 언덕 위에 남으리.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스물 한 해를 살아온 잭 콜린스의 심상 속에서 하이랜드는 유년 시절의 추억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다. 그의 물리적 고향인 글래스고는 수많은 군중과 마차, 신문팔이 소년들의 경적이 교차하는 대도시였으나, 잭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그의 진정한 고향은 그 번화한 도시가 아닌, 쓸쓸한 녹음이 거친 구릉 위를 덮고 있는 하이랜드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그 같은 습성이 잭 콜린스만의 독특한 기벽인 것은 아니다. 18XX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청년들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개 잭이 겪는 것과 비슷한 가상의 그리움, 혹은 잃어버린 고향을 향한 감상주의적 향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옛 선조들의 흔적과, 몰려드는 잉글랜드 왕의 군사 앞에서 억새풀처럼 버티었다던 그들의 전설은 이제 ‘상상의 공동체’가 되어 스코틀랜드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잃어버린 옛 땅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젊은이들 가운데, ‘다시금 우리의 정당한 자유를 되찾겠노라’ 꿈꾸는 무리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1800년대 전반기의 유럽에서는 민족의 완전무결한 자결을 외치는 함성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황제는 ‘보편’을 외치며 만국의 땅 위로 말발굽을 내달렸으나, 공교롭게도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마다 그 열방에서는 ‘독립’이니 ‘개별’이니 ‘민족’ 같은 정반대의 열망이 우악스레 씨앗을 틔운 것이다. 국명 스코틀랜드가 지명 스코틀랜드로 바뀐 지 백 삼십 여 년. 로우랜드에서 태어나 하이랜드를 꿈꾸는 잭 콜린스 또한 동료들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에 합류한다.

한창 낙관과 패기를 발산할 나이의 젊은이들은 그들 나름의 열정을 지니고서 이상에 매진하나, 돈과 미래라는 현실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그들은 그들의 땅 하이랜드를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하이랜드에서는 기회를 잡을 수 없다. 한 해 한 해, 조금씩 다가오는 현실의 위협 앞에서 결국 콜린스는 결정을 내린다. 나이가 찬 잭은 ‘열등한’ 스코티쉬로서 자신이 받게 될 차별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택한다. 개탄스럽고 야속하지만, 동시에 그 장소가 약속하는 기회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는 곳, 잉글랜드. 양가감정이 들끓는 그 도시에서 콜린스와 파리어는 만난다.

이 다음부터는 뻔한 이야기다. 서로 다른 집단의 갈등하는 젊은이들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싸우고, 저주하고, 서로의 심장에 시린 비수를 꽂았다가, 끝내 돌아서는 이야기. 인간사를 관통하는 모든 사랑 이야기의 뼈대는 같나니, 이탈리아 베로나─몬태규와 캐퓰릿의 정사를 1861년 조지아로 옮기면 그것이 곧 불타는 애틀랜타에서 신랄하게 연정을 고백하는 오하라와 버틀러의 이야기라.

186X년, 차가운 안개가 흐르는 런던에서 만난 파리어와 콜린스의 사정도 이 뼈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직 이상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는 젊은 타지인과, 이미 오래전에 이 우울한 도시가 주는 타성에 젖어버린 일등시민은, 서로 사랑에 빠지는 동시에 갈등하고 부딪친다. 다만 이들이 조지아의 연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용한 이상을 고집하며 분리운동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콜린스를 파리어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레트는 스칼렛을 떠날 수 있지만, 파리어는 콜린스를 버리지 못한다. 버릴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바다보다 깊어 어느 깊은 지식과 학문으로도 헤아릴 수 없으니, 그 앞에서는 번뜩이는 이성과 중용의 합리성도 힘을 잃고 스러지리라. 잉글랜드인은 자신의 심장이 잭 콜린스라는 이름을 한 무용한 열정에 엮여버렸다는 것을, 이미 한참 전에 그 무모한 주박에 걸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계절이 지나고 다시 축축한 가을이 돌아오고, 두 남자는 여전히 서로의 곁을 맴돈다. 단 한 번 얼굴을 보기 위해 매일 저녁 도시의 끝에서 끝을 오가는 발길, 서리 낀 겨울날 단 오 분의 만남을 위해서 열 배의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 남들처럼 트라팔가 광장 계단에 앉아 조심스레 손을 잡아보고 싶은 욕심. 넓게 편 타블로이드 지를 방패삼아 짧게나마 남몰래 입 맞추는 용기. 이 모든 마음을 두고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사랑이라 부를까?

그러나 성스런 책에서 이르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선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황금률은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는 두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권고다.

사랑에 빠져 세상이 진홍빛 꽃구름으로 물들어 가도, 콜린스의 시야에서는 핍박받는 동족의 모습이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먼지 낀 흙바닥처럼 체념과 무력과 분노가 뒤엉킨 익숙한 눈빛들이 그를 사로잡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일부를 이루었던 공정함을 향한 열의, 정당한 분노,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일렁이는 행동에의 열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콜린스는 예감한다. 한 남자로부터 받는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는 자기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공허한 구덩이─선조들의 원죄가 만들어낸 그 텅 빈 구멍을 메울 수 없다고.

그렇게 계속되는 콜린스의 이탈 행위를 파리어는 이해하지 못한다. 열 세 해를 더 살았고 그만큼 세상살이에 익숙해진 어른은, 부나방처럼 당장이라도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저 어린 것을 자신이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콜린스의 다감한 성정은 젊은 시절의 짧은 꿈 안에서만 존재해야 할 뿐, 그 이상 이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에 익숙한 파리어는, 콜린스를 자신이 속한 안전한 세계에 들여놓고 싶다. 격동도 파란도 없는 유순한 잉글랜드에─자신이 직접 기반을 다져둔 공고한 기득권의 성벽 안에 앉혀 놓으려 한다. 그래야만 그를 곁에 둘 수 있으니까. 그는 열정적인 이상주의자는 못 될지언정, 헌신적인 연인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부조리와 모순으로부터 눈 돌리는 겁쟁이도 될 수 있노라 맹세한다. 물론 그에게 그 부조리를 처음 보여준 사람은 콜린스였다. 그래도 파리어는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간절함이나 정의만으로 바뀔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니까.

런던과 리버풀에 즐비한 비좁은 공공주택에서는 점점 더 비참한 이들의 침묵하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중에는 맑은 자음과 탁한 모음의 억양이 특징적인 하이랜더가 외치는 비명도 포함되어 있다. 콜린스의 심장에서는 응당한 의분의 불길이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토록 다른 자신과 파리어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지, 언제까지 이 사랑이 계속될 수 있을지 회의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연인을 향한 연정과 실망이 그의 심장을 뒤틀어 놓고 갈등을 부추긴다. 그러나 파리어는 흔들리지 않는다. 애써 설명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가 스코틀랜드의 이 젊은 급진주의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미 너무나 커져버려서,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둘의 천성 따위는 의도적으로 망각되어버렸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조차 내버린 파리어의 사랑이 콜린스의 사랑보다 더 깊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후 몇 번의 공장 화재와, 갱도 사고와, 노동쟁의와, 경찰의 진압이 일어난다. 186X년의 런던에서는 평범한 일상들이다. 콜린스가 일하던 공장은 파업과 직장 폐쇄가 반복되다가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주후 천 팔백 일흔 한 번째의 태양이 밝아오고 그 해에 위대한 제국은 인도를 병합하지만, 기회를 찾아 잉글랜드로 내려온 하이랜더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패기 넘쳤던 젊은 청년은 반복되는 좌절과 고난 속에서 이제 지쳐버렸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아간 파리어 저택에서 콜린스는 고향의 노래를 읊는다.

내 심장은 여기에 있지 않으니, 하이랜드에 있어라.

사슴을 뒤쫓던 그 푸른 언덕 위에 남아 있어라.

어느 흙을 밟아도, 어느 곳을 헤매어도 잊히지 않으니

안녕, 울며 굽이치던 급류와 강물이여.

나는 더 이상 이곳을 견디지 못하겠어요. 아뇨,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요. 파리어, 제발! 리버풀, 맨체스터, 요크셔, 어디라도 나한텐 똑같아요. 내가 태어난 곳으로, 내 언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할 거예요. 이곳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런던의 공기는 날 위축시켜요. 이 도시의 숨 막히는 침묵 속을 걷고 있으면 진짜 내 모습까지 잃어버리는 기분이에요. ……안녕, 파리어. 감히 내가 할 말이 아니란 걸 알지만…… 부디 건강하세요. ……부디, 부디 행복하세요.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황금률은 깨져버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리어는 기어이 자신의 안전한 성벽 안에 콜린스를 보호하려 했을까? 아니면 절박해진 나머지 그를 따라 믿지도 않는 신념에 투신했을까? 콜린스가 실망하여 발걸음을 돌리던 그날, 그는 돌아선 연인의 뒷모습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았나?

우물처럼 깊은 사랑을 말로 표현할 줄 몰랐던 과묵한 남자는 이름을 부르며 붙잡지도,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다만 조용히 뚝뚝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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