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떤 공상

발행 시기: 17년 11월 18일 (파린스 교류전에서 배포)

커플링: 파리어콜린스 (덩케르크)

성향: 2차 BL, 전연령가

요약: 다이나모 작전 전의 어느 날, 파리어와 콜린스가 전역 후 세계 일주를 꿈꾸며 대화를 나눕니다. 

목차: 1. 본편  2. 작가 노트  3. 주석 모음


* <어떤 공상>은 교류전에서 메인 원고 외에 부가적으로 배포한 돌발본입니다. 또한, <코카투!>를 구매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뜻으로 추가 출력하여 함께 넣어 보내드린 책이기도 합니다. 기획 때부터 추후 무료 웹 공개를 하기로 계획하고 배포한 것이니, 블로그에 공개해도 되리라 믿고.... 올려봅니다. (.//.)>


* 웹 공개에서 달라진 점: 실물 책에서 각주로 달았던 주석을 모두 미주로 전환했습니다. 이는 포스타입이 각주 기능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웹상에서의 가독성을 조금이나마 증진시키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ㅠ~ㅠ 


* 본문에서 (*주n) 처리 된 부분은 포스트 가장 마지막 부분에 미주로 모아서 정리해 놓았습니다. 
















공상은 어느 나른한 가을날 오후에 시작되었다. 훈련과 훈련 사이에 주어진 삼십 분 간의 짧은 휴식을, 파리어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도시를 헤아리는 데 온전히 소비하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전역하면 세계 일주를 한 번 해보자고.」

「전역은 언제 하는데요?」

「전쟁이 끝나면 전역을 하는 거지. 의가사 제대로 전역하면 비행기를 못 몰잖아. 그럼 세계 일주는커녕 고향 가는 차 운전도 못 하는 거고.」

「그러니까 전쟁이 언제 끝난단 말씀이십니까? 한 달 뒤? 일 년 뒤? 아니면 십 년?」

「참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그리고 십년이라니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높으신 분들이 조약이니 협상 체결이니를 반복하다보면 그때 끝나는 거지. 언제는 졸병들이 전쟁을 끝낸 적이 있었던가? 그건 항상 후방의 마호가니 소파에 드러누워서 말만 조잘대는 정치가들 소관이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대위님은 참 속도 편하십니다. 이 귀중한 삼십 분을 그런 공상에 쓰시다니 말입니다.」

「소위가 너무 딱딱한 게 아니라? 에이스가 되려면 전투와 전투 사이에 재빨리 긴장을 털어내는 법도 터득해야 해. 그리고 긴장을 털어내기에는 이런 저런 공상 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없지. 그 팁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니, 넌 십자훈장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

「네, 그러십니까. 대위님은 훈장 받으셔서 좋으시겠습니다. 나중에 거기서 나오는 특별 연금 두둑하게 타셔서 크루즈 여행이라도 가시지요. 요새 키프로스 유람 코스가 그렇게 인기랍디다.」

「포부가 작군, 소위! 내가 운전을 할 줄 아는데 왜 굳이 택시를 타나? 전역할 때 정비병들 찔러서 남는 기체 하나 넘겨달라고 할 거야. 그걸로 직접 돌아다닐 생각일세.」

「……그거 로비하는 데만 연금 일시불의 절반은 날리시겠네요. 뭐, 잘해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삼년 내내 군화 똑바로 신고 뒷바라진 해준 애인도 제쳐두고 꿈을 이루러 가셔야 하겠다는데, 꼭 성공하셔야죠. 아무렴요. 네. 절대 국방부에 익명으로 비리 신고를 하는 치졸한 짓 따윈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뒤끝 있는 인간은 아니니까요.」

「어이, 콜린스. 삐지지 말고. 나더러 망상이 심하다더니 정작 과장이 심한 쪽은 자네군. 그렇게 생각이 나쁜 쪽으로 마구 뻗쳐나가게 두면 못써. 장거리 비행에는 부기장이 필수잖아? 교대운전은 네가 맡는 거야.」

「사전 고지도 없이 낙하산 채용이라니, 대위님 보기보다 융통성이 좋으십니다. 그럼 제안을 승낙해드리는 대가는요? 이래봬도 꽤 비싼 몸입니다, 저. 종전해도 조국에서 이 귀중한 인재를 안 놔주려고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첫 목적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넘기도록 하지.」

「파리요.」

「파리? 예술에 조예가 깊나? 아니면 패션? 거긴 너무 평범하지 않아? 모처럼의 세계 일주라고.」

「사실 프랑스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들판 위에 늘어지게 누워있던 파리어가 그 말을 듣고 콜린스 쪽으로 슬쩍 몸을 틀었다.

「설마 프로그 남자 쪽이 더 취향이었던 거야?」

「의심 많기는. 제 정절을 함부로 모함하지 마시죠. 이건 그냥, 그러니까, 파리에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비밀 결혼식을 올릴 수 있대서 생각해본 겁니다.」

「교회에서 집전을 해준다고? 법적으로? 시청에 신고서 내고?」

「그건 아니지만 암암리에 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대요. 파리의 골목 골목에 숨어 있는 그 많은 카페와 댄스홀을 생각해보면 그럴 법하지 않습니까?」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었어?」

「포스터 씨의 친구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아무튼 다 소식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미발표한 원고에 그런 내용이 있더랍니다.(*주1)

「좋아, 그럼 파리에서 그 비밀 증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식을 올린다고 치자고. 그 다음은 어디로 가지?」

「기왕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계속 그 쪽으로 가보죠. 그럼 독일?」

「반대일세. 춥고 음침한 데는 질색이야! 일평생을 브리튼 섬에서 살았는데 모처럼의 신혼여행까지 그런 데로 가서 쓰겠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저도 제리놈들이 열광하는 검은 숲이니 라인 강 같은 데는 별 관심 없습니다. 쭉쭉 넘어가서 남남동으로 기수를 틀까요? 사람이 살만한 지중해와 발칸의 섬으로 가는 겁니다.」

「싸늘한 북해와는 이별이군. 난, 그 어디냐, 볕 잘 들고 오징어 먹물요리가 일품이라는 섬에 가보고 싶어. 미코노스였나?」

「……오징어를 먹어요……? 대위님 겉보기보다 미식 감각이 영…… 그래도 페타치즈와 올리브 절임은 언제나 최고의 조합이니, 기꺼이 동참하도록 하지요. 자, 그리스 끄트머리에 발을 담갔으니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참고로 전 언덕 위에 먼지 쌓인 돌덩이 굴러다니는 폐허나 신전에는 관심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질세. 그런 옥스퍼드 도련님들이나 열광할 법한 취향은 멋이 없어. 우린 조금 더 모험적이고… 야생의 미지가 남아있는 땅… 그런 곳으로 가자고!」

파리어가 두 손을 힘차게 짝짝 맞부딪히며 말했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요?」

「북동쪽. 에게 해를 거슬러 오르고 보스포루스의 좁은 틈을 지나서 이스탄불로 가자고. 황금 모자이크와 푸른 모스크의 도시를 보는 거야. 그리고 세상의 온갖 진귀한 단맛만 모아 만들었다는 설탕과자를 맛보는 거지.」

「예, 대위님. 작년 기점으로 전세계 사탕수수 수입량 1위가 우리 대영제국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요.」

「음, 그런가? 그래도 본고장의 맛은 다르겠지. 대전쟁(*주2) 전까지만 해도 명색이 술탄이 다스리던 비옥한 제국인데, 거기서 나는 설탕과자는 같은 사탕수수를 썼어도 입 안에서 살살 녹지 않겠나.」

「좋습니다. 그럼 함께 마실 차도 챙겨야 하겠군요! 맛이 아주 달다고 하셨죠? 그럼 차는 풍미가 깊고 진한 종류로 준비하겠습니다.」

「역시 말귀를 잘 알아듣는군, 콜린스. 그래서 자네가 좋아. 그럼 디저트는 푸른 모자이크와 채색 타일로 장식된 터키식 카페에서 즐기도록 하자고. 물담배는 한 번도 피워본 적 없지만 맛이 궁금해지는군.」

이 대목에서 콜린스 소위는 대위의 팔 한 짝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담배 끊으신다면서요.」

「이 시국에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차피 거기 아니면 피워보지도 못하는 별미니까 좀 봐 줘.」

「딱 한 번 만입니다, 그럼. 관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봐드리기로 하죠. 투르크의 땅을 지나서,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콜린스, 항로는 이미 소아시아로 접어들었다고. 다음 기항지는 물 보듯 뻔한 거 아닌가? 모험의 땅, 아라비아지!」

「거긴 로렌스 경이 이미 한 끗발 휩쓸고 지나갔잖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뒤늦은 2인자, 아니, 아마 147번째 모방자가 될 뿐이라고요. 게다가 전 그 복잡한 땅과는 연관되기 싫습니다. 베두인과 쌍봉낙타가 사는 땅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전전긍긍하는 건 높으신 분들의 욕심만으로도 충분해요.」

콜린스의 사리에 맞는 설명을 듣고, 파리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렇군. 다시 생각해보니 아라비아는 비행 여건도 영 좋지 않아. 선배들이 수없이 말했다시피, 사막은 언제나―」

「조종사의 소리 없는 무덤이니까요.」

그 대답을 신호로 대화는 끊기고,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둘 중 누군가는 사막의 사구에서 묻혀간 선구자들을, 또 다른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도 않는 신기루를 향해 걷다 쓰러지는 조종사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을 것이다.




대화는 콜린스에 의해 재개되었다.

「그루지야(*주3)는 어떻습니까?」

「그루… 뭐? 거기가 어디냐.」

「터키 지나서 중앙아시아로 들어가기 전 말입니다. 흑해랑 카스피 해 사이에 있는 교각처럼 좁다란 땅 있잖습니까.」

「거기 뭐가 있는데?」

「황금 모피요.」

「뭐?」

「색슨, 게르만, 켈트, 라틴―우리 선조들이 알고 보면 전부 다 그 좁은 땅에서 건너 왔답니다(*주4).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그 산에 묶여서 간도 쪼아 먹히고, 황금 모피를 찾아 흑해를 건너 온 이아손에게 메데이아가 보물을 넘겨주고(*주5).」

「코카서스에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나? 흥, 아까는 안 그런 척 같이 옥스퍼드 애송이들을 욕하더니 실은 본인께서도 소싯적에 고전 깨나 읽으셨구만.」

「아, 왜 그러십니까, 진짜. 유치하게. 십자말풀이 하다가 본 겁니다.」

「그래서 그 황금 모피가 갖고 싶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모피를 가져다주면, 그래, 여왕께서는 이 충직한 영웅에게 어떤 상을 하사하실 생각이신가?」

「그 반대입니다. 이 경우에는 콜키스의 여왕인 ‘제가’ 모피를 구걸하러 온 이아손 당신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베푼단 말입니다. 마법사의 지혜가 없으면 에게의 영웅도 난파당한 항해자에 그치지 않으니, 나 없이는 당신 역시 아무것도 아니어라.」

「그리고 대신 자네를 데리고 함께 금의환향하면 되는 건가? 응? 메데이아를 데려간 이아손처럼?」

「하지만 조심하십쇼. 이아손의 못된 배신까지 따라하면 아주 제대로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메데이아가 어떻게 복수했는데?」

「남동생을 죽여서 그 시신을 여덟 토막으로 나눈 다음, 부친의 군대가 뒤를 좇아올 때마다 한 조각씩 바다 속으로 던져 넣었지요.(*주6)

「……」

「아, 이건 아직 결혼하기 전 얘기던가? 어쨌든 매우 무시무시한 복수를 했었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둘을 직접 죽여서 후세의 대를 끊기게 하고―(*주7)」

「그만, 그만.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랫도리 간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그런 놈팡이랑은 다르니까, 섬뜩한 경고는 그만해주겠나?」

「주저하지 마라, 계약에 네 재주를 아끼지 마라. 메데이아, 끔찍한 일을 용감하게 해 치워라. 지금이야말로 네 용기를 시험할 때니!(*주8)

그러면서 젊은 소위는 짐짓 과장된 손짓으로 배우 시늉을 냈다.

「……설마 대사를 외운 거야?」

「사실 어젯밤 BBC 라디오 극장에서 고전 명작 시리즈를 해주길래……」

말해놓고도 머쓱했는지, 콜린스는 금방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 피비린내 나고 끔찍하게 실패한 연애담은 그만 뒤로 하고 좀 더 아름답고 모범적인 연인을 찾아 떠나보자고. 거리도 별로 멀지 않아. 메데이아의 고향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계속 내려가는 거야. 그리고 대고원을 지나서 삼각형 대륙으로 들어가. 많이 넘어갈 것도 없어. 히말라야의 서쪽 끄트머리를 살짝, 아주 살짝만 스쳐서 내려가면 바로 그곳에 전설적인 대리석 궁전이 있어. 사랑하는 황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순백의 대리석 수천 톤을 쌓아 올렸대. 궁전 앞 정원에 흐르는 인공수로는 알라의 강을 닮았고 그곳에 심은 수만의 꽃과 식물은 알라의 꽃이니, 그야말로 회교(回敎)에서 말하는 천국을 지상 위에 실현하려 했다는 거야. 오직 사랑하는 황후,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서. 어느 이탈리아 여행가의 전설에 따르면, 그 맞은편에는 훗날 자기가 묻힐 무덤―말하자면 검은 타지마할을 세우려고 한 흔적이 남아있다는군. 죽어서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어 신의 세계에서 재회하려고 했다니, 이런 전설이야말로 낭만적이잖아?」

「네, 그리고 황제는 바로 그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다가 정적들에게 빌미를 잡혀 유폐당해 죽었죠.」

「콜린스, 생각보다 냉정하고 무감각한 면모가 있군!」

「그러는 대위님은 뜬금없이 사나이 감성이 터질 때가 많아서 걱정입니다. 그렇게 지고지순하게 굴다가 어느 영악하고 변덕스런 새한테 걸려서 뼛속까지 털리지는 않을까 몰라.」

「그렇게 걱정이 되면 네가 평생 곁에 두고 감시하면서 살아. 날 이끌어주라고. 문을 열어주오, 여왕이여. 당신이 나의 성이니 내가 그 방 한 칸에 세  들려고 하오. 당신 발밑에 늘어놓을 짐 한줌뿐이나, 수천의 달콤한 입맞춤으로 보답하리라.」

「아뇨. 당신이 나의 왕이니 내가 당신 성의 도개교라. 수천의 키스를 대가로 그 문을 열어드리죠.(*주9)

그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보란 듯이 시를 읊으면서 응수했다. 몇 초 간 정적이 이어지다가, 이내 대위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래서 네가 좋아. 죽이 잘 맞잖아.」




「자, 실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시지요, 파리어. 아무래도 난 인도는 영 불편하단 말입니다.」

「국왕 폐하의 충성스런 군인으로서 못 하는 말이 없군, 콜린스. RAF의 어마어마한 재정과 우리 월급이 다 그 땅에서 나온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야?」

「안다고 해서 편해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난 그저, 그 땅에서 온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이렇게, 답답하게 막히는 것 같아요. 모순 적인 건 알지만 어떤 부채감이…… 버마, 버마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오리엔트는 건너뛰어야겠군.(*주10)

「그곳에 파견된 동료들로부터 소문을 들었어요. 수시로 찾아드는 소나기와 습한 우림에 있다 보면 정신까지 그 습기에 젖어버리는 것 같다고요. 물에 젖어버린 솜처럼 심장이 눅눅해져서 곰팡이가 피고, 그래서 그곳에서는 양심도 무엇도 거리낄 게 없어진다고.」

「……그 중에 버마인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나?」

「있었습니다. 많이요. 대개는 그들의 학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보어에서처럼요. 이 하늘을 선택한 이상 우리는 살인을 업으로 삼은 셈이지만, 그래도 죽어가는 상대의 표정을 볼 때는 미묘한 차이가 있더란 말입니다. 예전에 만났던 한 기자는 그래서 이튼을 졸업해놓고 제국 경찰에 지원하는 기행을 저질렀으면서도, 결국 오 년도 못 채우고 버마를 떠났다고 했어요(*주11). 그 사람들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나. 그러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와 외곬수에다 삐딱하기까지 한 기자가 된 거죠.」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제 발로 걷어찼다고? 대범한 양반이네. 그래서 그 후엔 어떻게 되었나?」

「잘 모르겠어요. 런던에 갔을 때 우연히 펍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 걸요. 이런저런 수기나 르포를 쓰다가 몇 년 전엔가 스페인으로 넘어갔고, 거기서 카탈루냐 내전에까지 자진해서 말려들었단 소식은 들었는데……(*주12)」

「인생 재밌게 사는 사람이네.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네? 대위님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 전혀 아니었습니다! 무슨 상상을 하시는 겁니까, 진짜. 모처럼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질투나 하고, 하여튼.」

「미안. 난 성자는 못 되는 인간이라서. 그나저나 버마 얘기를 계속 하다가는 너까지 그 습한 우림 속으로 빠져버리겠는걸. 더운 거 싫어하잖아.」

「네네, 걱정을 위시한 이기와 무관심이라니, 꽤 로맨틱한 변명입니다. 성공적이었어요. 이번만 넘어가드리죠.」





미처 음울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말하는 콜린스의 어깨를 파리어가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콜린스를 품에 안은 채로, 그는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맞대며 강아지가 주인에게 애교 부리듯 코를 문질렀다.

「아우, 정말. 적당히 하시죠.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누가 보면 어쩌냐고? 그럼 바다를 건너서 도망가야지. 아무도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는 곳까지 날아버릴 거라고.」

「다시 인도양으로요?」

「아니, 태평양.」

「미치셨군요! 어떤 파일럿도 태평양 도해를 성공한 적은 없어요. 금문교를 보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물에 빠져 죽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벨벳처럼 부드러운 지중해와도, 우리의 아담한 도버와도 영영 작별이 되겠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항해 도중에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거대한 선박을 제조 중이라는 소문이 있어. 어떻게 아나? 이 전쟁이 끝날 즈음엔 바다 한 가운데 기착해서 급유를 하고 다시 날아갈 수 있는 기술이 나올지?(*주13)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아주 빠르게.」

「그런 어마어마한 돈지랄을 계획하다니, 아메리카인들은 역시 허풍이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 합동훈련 때 잠깐 만났던 미군들도 참으로 껄렁하기 짝이 없었지 뭡니까. 짝다리를 짚고 작전 회의에 참여하질 않나, 정비 중인 기체 바로 옆에서 껌을 짝짝 씹어대질 않나. 자길 실어 나르는 파트너에 대한 예의가 참 없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네 도시에는 최고로 높은 빌딩이 몇 채고, 가장 값비싼 레스토랑의 샹들리에가 다이아몬드 몇 K로 되어있느니―」


「음, 정말 쓸데없는 크기에 집착하는군. 정작 사이즈가 중요한 곳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흐응.」

콜린스가 모르는 척 의뭉스럽게 시선을 피했으나, 그의 한쪽 손은 분명하게 옆에 누운 파리어의 허벅지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럼 모든 게 크다고 그렇게 자랑하는 아메리카에도 한 번 들러볼까?」

「나쁘지 않죠. 하지만 대위님 말대로 사이즈가 정말로 중요한 건 다른 경우니까, 그 대륙을 전부 횡단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딱 한 군데만 뽑아서 들렀다 가죠. 정 가운데로. 그럼…… 시카고?」

「골라도 꼭 그런 시가 냄새 풍기는 도시를 고르나. 캘리포니아의 볕과 콜로라도의 붉은 협곡에는 내려 앉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스쳐가겠네.」

「대신 재즈가 있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아까 미국인들더러 허풍쟁이라고 욕하긴 했지만, 그네들 고향에서 유행 중이라는 춤은 꽤 멋있었어요. 스윙과 지터버그, 린디 홉… 런던의 왈츠는 이제 질려요. 우리도 좀 더 대담한 춤을 춰보자고요.」

「스윙이라면 나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지. 할리우드 영화에서였어. 제목이 열정 어쩌고저쩌고 하는 영화였는데,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 딱 한 장면, 여자 댄서가 두 남자 사이에서 누구를 고를지 몰라 갈등한다는 가사의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는 장면이 있었어. 한 춤을 셋이서 추는 격이었던 거야.(*주14) 그 댄스 장면에서는 남자 파트너가 여자 댄서를 번쩍 들어올리고, 회전하고 던지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던데, 그 동작을 따라 하기엔 자네 장신이 조금 문제가 되지 않을지……」

「지금 제 키가 불만이시란 겁니까?」

「현실적인 걸림돌을 적시하는 거지. 난 너 아니면 다른 사람과 춤출 생각 따윈 전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널 들어 올리는 동작을 따라하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기껏 번쩍 들쳐 안는 시늉을 했는데 정작 콜린스 네 발은 땅에서 일 인치도 안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낯이 팔리겠냐고. 두 번 말하지만, 네가 아니라면 애당초 그런 정신 산만한 춤을 출 의향 따위는 없단 말이야.」

「방금 전까지 사이즈가 중요한 곳은 따로 있다며 달변을 늘어놓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거죠? 고작 중력의 방해와 쪽팔림 정도를 두고 장애물이라니요? 역경을 뚫고 솟아오르는 RAF는 어디 갔습니까? 패기 없어요. 비겁한 변명입니다.」

콜린스가 책망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대위는 그 가장된 경멸조차 사랑에 빠진 자이 열렬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귓가에 입술이 닿을 만큼 바싹 닿았을 때, 소리를 낮춰 숨소리 하나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이서 속삭였다.





「그렇다면 이 제안은 어때? 스윙보다 더 좋은 춤을 알고 있어. 더 긴장되고 스릴 넘치면서 등골까지 오싹 소름이 돋는 춤이지. 아르헨티나로 가는 거야.」

「부에노스아이레스!」

파리어의 제안을 들은 콜린스의 눈이 다시금 관심으로 반짝였다.

「어때, 구미가 당겨?」

「스윙이 경박해서 싫다고 했으면서, 도리어 더 관능적인 장르를 들이밀다니. 대위님도 한 뻔뻔함 하십니다.」

「그래서 반한 거잖아? 네 속마음은 진즉에 간파 당했으니, 인정해. 그리고 탱고는 원래 남자 둘이서 추는 춤이 원조란 말이야. 분노로 불타는 두 남자가 결투 대신 서로 공격하는 시늉을 내면서 추는 무시무시한 동작이란 말이야. 프랑스인들이 그걸 가져가서 농염한 열정의 춤으로 둔갑시켜 역수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고. 그렇지만 거친 가우초들의 고향에서는 아직 그 신성한 결투의식이 계속 지켜지고 있을 테니까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속에 섞여들자는 말이시군요.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모처럼 괜찮은 제안이었어요, 대위님. 그리고 자정이 지나서 춤도 끝나고 밴드의 음악도 멎은 후에는 바다로 가나요? 요트의 기다란 돛대들이 길게 늘어서서 가로등 대신 불을 밝히고 있을, 밤의 부둣가로?」

「맞아. 새벽이 되어도 잠들지 않는 항구의 호텔로 자넬 데려갈 거야. 선창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방을 잡아서 셰리주를 시키고, 취할 때까지 마실 거
야. 알콜의 해일 앞에서는 너도 어쩔 수 없겠지. 언제나 숨기려고만 하는 네 속내,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까지 열어젖혀서 술김에 네 생각을 전부 말해버리도록, 날 향한 감정을 모조리 쏟아내도록 취하게 만들 거라고. 이번에야말로 자네가 고백할 차례인 거야.」

「혀가 마비될 만큼 달고 독한 셰리주라면 어디 한 번 고려해보겠습니다. 부디 파리어 당신 작전이 성공하길.」

콜린스가 잔을 들어 올리는 흉내를 내며 가짜 축배를 올렸다. 그 깜찍한 짓이 파리어가 보기에 몹시 흡족했기에, 그는 상체를 틀어 젊은 연인의 몸 위로 올라탔다. 비어버린 대화의 자리를 대신 질척한 입맞춤이 채웠다. 두 사람의 농염한 상상이 불러온 유혹이 너무 강렬했기에, 한동안 대화는 재개되지 못했다. 한참 뒤 파리어가 가쁜 호흡을 정리하며 겨우 콜린스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여행지로 향하는 거야.」

「어디로요?」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

「그래, 파타고니아. 세상의 끝, 남미 대륙의 좁다란 꼬리, 그 고독한 고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산티아고, 그리고 안데스를 넘어가야겠군요. 위험한 여정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있었나?」

「우리의 선배 격인 지난 세대의 야간 우편 조종사들이 유럽과 남미를 오갈 때 그 산맥을 넘었다는 기록이 전설처럼 내려오기는 하죠.(*주15) 하지만 무슈 생텍쥐페리는 그 산맥의 흰 봉우리 사이에서 영영 친구를 잃었어요.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구치면서 앞길을 막고, 눈보라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그리고 본인은 파타고니아로 향하는 도중에 그만 폭풍에 휩쓸려 구름 위 별들의 세계로 올라가 버렸죠.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구름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 차디찬 수억의 보석을 쥐고, 하늘이라는 동굴에 갇혀서.(*주16)」

「그렇게 시큰둥하게 굴지 마, 콜린스. 그 안개 산맥만 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팜파스의 얌전한 대평원이 펼쳐질 테니까. 그럼 우리는 지는 해를 등지고 그 평원 위로 내려앉아서 황혼이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갈 때까지 지평선을 바라보는 거야. 그 들판에서 밤을 지새운 다음, 새벽이 밝으면 푼타아레나스 항구로 이동할 거고. 그곳까지 가는 길에서 우린 갈라진 빙하와 빙하호가 끝도 없이 늘어서서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풍경을 보게 될 거야…… 그 협곡 같은 고원 위로 아슬아슬한 착륙을 성공시키면 이제 여행은 끝나는 거야. 비행기로 갈 수 있는 최남단까지 도착했으니, 말 그대로 세상의 끝에 도달한 셈이지(*주17).」

「고원, 빙하, 빙하호. 그게 다에요?」

「바다사자 군락도 있어.」

「그것 참 심심하네요. 우리 여행의 종착지가 그런 황량한 겨울 고원이라니. 그전에 지나온 부에노스아이레스며 시카고처럼 화려한 도시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푹신푹신한 잠자리와 문명의 이기를 뒤로 하고 향하는 마지막 장소가 그런 야생이라니, 대위님 역시 취향이 좀……」

「이봐,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백 년도 더 전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꿈꾸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지나갔던 그곳을 우리는 하늘길로 가는 거야. 그리고 장담하건대, 몇십 년이 지나기 전에 안목 좋은 여행가가 나타난다면 분명히 우리가 지나간 하늘길의 진가를 알아보고서, 그 궤적을 따라 세상에 한 번도 써진 적 없는 방식으로 그곳으로 가는 여행기를 남길 테니, 두고 보라고. 어쩐지 그런 직감이 들어(*주18).」

「대위님은 가보지 않은 세상을 참 잘도 상상하시는군요. 보지도 못한 곳이 그렇게 그리울 수도 있는 법입니까?」

「가보지 않았으니 더 그리워하는 거지.」





「그런데, 파리어. 우리가 나눈 이 이야기의 정체는 결국 뭐였던 거죠? 허황된 거짓? 아니면 헛된 망상? 진짜 계획이긴 한 겁니까?」

「아니, 이 모든 대화는 꿈이야.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가게 될 세상에 대한 꿈이지.」

「낭만적인 대위님이시네요.」

「‘자네의’ 낭만을 아는 대위지.」

파리어는 과장스레 눈썹을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꼭 칭찬해달라는 모습 같았다. 마음이 풀어진 콜린스는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기꺼이 그 부탁에 응했다.

「……그래요. 당신이 말한 파타고니아라는 고원, 그 황량한 세상의 끝으로 갈 때는 꼭 나도 함께 데려가세요.」

「내 스핏파이어를 걸고 맹세할게.」

「진실로? 못된 이아손처럼 맹세를 깨면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나, 아주 많이 슬플 것 같거든요.」

긴 대화 끝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는지, 소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내 파리어의 가슴팍으로 고개를 슬며시 묻었다. 곧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삼십 분이었던 휴식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공상의 여운은 잔향이 되어 잠든 청년의 꿈속으로도 스며들었다. 깨어있던 파리어만이 그 모든 풍경을 끌어안고서 남은 오후의 햇빛 속에 먼 세계가 비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 * *



“……그러니까 나는 꼭 돌아가야 해. 약속했거든, 그 녀석하고. 반드시 함께 데려가겠다고.”

파리어는 단 하나 남은 이름 모를 외국인 동료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왼쪽 다리를 움켜쥐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니까 이 지랄 맞게 추운 시멘트 창고 안에서 얼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다.’

동토의 땅에 지어진 포로수용소의 겨울은 혹독했고, 당장 전투에 투입할 물자를 대는 것만도 힘에 부친 독일군은 수용소의 포로들한테까지 제대로 된 담요를 건네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틀 전 노역 중에 삽에 찔려 다친 다리의 상처는 점점 쑤시는 정도가 심해졌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이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전기를 맞은 것처럼 신경이 찌릿찌릿 쑤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통증을 잊어보려고 파리어는 애써 갈라진 목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마 당신은 못 알아듣겠지만, 난 돌아갈 거라고. 돌아가서, 꼭 걔를 데리고……”

어차피 맞은편에 앉아서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또 다른 포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람은 말을 해야 미치지 않고, 이런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복기뿐이니. 종이는커녕 신문지 조각 하나 주어지지 않는 버려진 수용소에서는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글을 읽을 기회도 없었다.

그는 언젠가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 일, 상상.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사람은 어떤 독방에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런데 지금은 일도 사랑도 잃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상상뿐이었다. 그 지나간 기억 속의 흐릿한 금언을 주문처럼 외우며, 포로는 같은 이름들을 반복하고 또 되풀이했다. 수년 전 어느 가을날의 오후에 콜린스와 함께 지구본을 돌려가며 짚었던 먼 이국의 지명들을.

‘파리, 미코노스, 에게 해를 지나 보스포로스, 아라비아, 코카서스―메데이아의 고향, 황후를 기리는 순백의 무덤, 버마… 아니, 버마는 가지 않을 거야. 그 녀석은 습하고 더운 걸 싫어하니까. 혼돈스런 오리엔트는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으니까. 태평양을 건너서, 서안의 황금 현수교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시카고―마천루와 스윙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와 끝나지 않는 부두의 밤, 셰리주―죽기 전에 콜린스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들어보고 죽어야지. 도시를 뒤로하고 안데스의 안개산맥을 넘어서 푼타아레나스로. 우리는 무슈 생텍쥐페리처럼 실패하지 않을 거야. 콜린스가 있으니까. 그렇게 도착한 마지막 기착지에는 고원과 빙하호, 팜파스의 황혼.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안 돌아가는 뇌를 쓰려고 하니 머릿속이 점차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많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복기하기에 그가 기억 속에 지닌 지명의 목록은 짧았으나, 그는 그 모자란 자리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그와 나눴던 대화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대신 채워 넣기로 결심했다. 시간의 폭력 앞에 흐려져 가는 것만 같던 그의 얼굴도 이렇게 그날의 대화를 회상하다보면 어느 새 점차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먼지 쌓인 사진처럼 빛바랬던 기억 속 콜린스의 금발이 그 색을 다시 되찾게 될 때까지, 그는 영겁 같은 회상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그리하여 다친 살을 도려내는 추위와 쓰라린 돌바닥의 아픔을 잊을 수 있도록. 자꾸 느려지려는 심장을 해방의 날이 도래할 때까지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도록, 그는 가보지 못한 세상을 공상하고 공상했다.



<끝>









* 작가 노트


전역 후 세계 일주를 꿈꾸는 파리어와 콜린스의 이야기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원고를 시작했습니다. 수기로 초고를 쓸 때는 어쩐지 저까지 그들의 여행에 동참한 느낌을 누리며 즐겁게 썼으나, 퇴고를 거치고 필요한 주석과 각주를 다는 과정에서는 제 선택을 후회하는 고통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풀어내고자 했던 일단의 이야기를 완성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소설 자체만으로 모든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모자라서 부득이 이번에도 작가 후기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파일럿인 두 사람이 왜 하필 전역 후 세계 일주를 꿈꾸는 이야기를 떠올렸는가?’에 관한 답입니다. 미국의 종군기자 어니 파일(Ernie Pyle)의 2차 대전 종군기록을 모은 『Here Is Your War』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복무했던 미국 병사들을 관찰한 기록집인 만큼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미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했던 군인들이 전역 후 세계 일주를 계획하거나 여행 사업을 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특히 시선을 끌었습니다. 이유인즉, 파일럿이라는 직업의 특성 상,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진 2차 대전의 특성 상, 여러 공중 전투에 참여했던 조종사들은 그동안 자신이 알던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를 보게 되었고, 비록 전쟁 중이라는 참혹한 시기에 처해있었으나 그 경험이 한편으로는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를 열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작 영화에서는 파리어와 콜린스가 1940년의 다이나모 작전 및 도버 해협 상공에서 이뤄진 영국 전투에 참여한 것까지만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 둘이 그 후 전개된 북아프리카 전선이나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2차 창작의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듯이, 이 책에서는 두 사람이 도버 외에도 다른 지역으로의 전투 비행을 경험해봤으리라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두 번째는 작중에서 콜린스가 버마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넣을지 말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영 제국주의의 對버마 정책에 대한 제 지식이 모자랐고, 또한 즐거움을 위해 쓰는 2차 창작에서 굳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나 싶은 걱정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영 제국주의 시기를 살아갔더라도 그 안에 살았던 개개인이 느꼈던 바는 제각각이었듯이, 2차 대전기(곧 영 제국주의 말기)에 군인으로 복무했던 콜린스와 파리어 또한 군인으로서의 의무와는 별개로 자국 정부의 선택에 관해서는 다른 감상이나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차 창작이라는 변명을 자꾸 내세우게 되는 것 같아 민망스럽지만, 이 또한 콜린스와 파리어라는 캐릭터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이자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좋게 표현해주고 싶었던 제 욕심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늘 부족한 점 많은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랑도 일도 잃었을 때, 다시 한 번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공상(상상력)의 힘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파리어처럼 단단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포로 수감이라는 어두운 시기도 그렇게 견뎌 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공상을 주제로 한 팬픽을 쓰는 내내 저 자신도 직접 공상의 놀라운 힘을 경험했습니다. 두 사람의 한때를 상상하고 있으려니 저절로 기분이 홀가분해지더군요. 읽어주신 여러분께서도 그런 공상의 재미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으셨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 E. M. 포스터, 고정아 역, 『모리스』, 열린책들, 2008.
- 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아카넷, 2010.
- 에우리피데스, 송옥 역, 『메데이아』, 동인, 2005.
- 조지 오웰, 정영목 역,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16.
- 조지 오웰, 김설자 역,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부북스, 2013.
- 생텍쥐페리, 이원희 역, 『야간비행』, 소담출판사, 2001.
-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 주석 모음


주1) 영국의 작가 E. M. 포스터의 장편소설 『모리스』는 20세기 초반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세 남성 간의 동성애와 계급의식에 대해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동성애자였던 E. M. 포스터는 소수의 신뢰하는 친구들을 제외하고, 1971년에 사망할 때까지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이는 1885년에 처음 제정되어 1960년대까지 유지된 영국의 反동성애법(정확히는 성인 남성 간의 동성애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 때문이었으며, 1967년에 비로소 이 조항이 폐지된 이후에도 포스터는 자신의 작품이 사회 여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출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전면적으로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자 1914년에 이미 완성했던 『모리스』는 그의 사후인 1971년에 유작으로 발표되었다. (E. M. 포스터, 고정아 역, 『모리스』, 열린책들, 2008, pp.345~348. 〈옮긴이의 말〉 참조.)

파리어와 콜린스가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1940년 경 당시에는 아직 이 작품이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콜린스가 직접 원고를 접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포스터는 1905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래 『기나긴 여행』,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인도로 가는 길』 등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며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고 기사 작위 제안을 받는 등 높은 인지도를 누리던 상태이므로, 그의 이 독특한 미발표 원고에 대한 소문은 당시 영국의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발을 걸치고 있던 사람이라면 암암리에 그 대강의 내용을 접했으리라 추론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덧붙여, 이 대사에서 콜린스는 『모리스』의 내용과 1895년 동성애 행위로 기소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경험담을 착각하여 언급하고 있다. 와일드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당시에 그의 친구들은 동시대 영국처럼 강력한 反동성애법이 존재하지 않던 프랑스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와일드는 영국에 남아서 수감 기간을 채우는 쪽을 선택했으나, 이 같은 일화는 영국의 동성애자들에게 종종 프랑스로의 망명이 하나의 도피 방법으로 여겨졌음을 시사한다. 이에 덧붙여, 포스터는 1960년에 직접 작성한 『모리스』의 작가노트에서 자신은 동성애가 불법화된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두 남성 주인공에게 어떻게든 행복한 결말을 주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가령, 그는 이렇게 적는다. “행복한 결말은 불가피했다. (…) 나는 소설에서 어떤 식으로건 두 남자가 사랑하게 하고 소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 사랑을 영원히 지키게 하기로 결심했다. (…) 나는 <더 행복한 날들>에 이 작품을 헌정했는데, 결코 빈말이 아니다. 행복이야말로 이 작품의 기조다.” (E. M. 포스터, 같은 책, pp.314~315. 〈지은이의 말〉 참조.) 본고에서는 포스터가 오스카 와일드를 포함한 기존 서구문학계의 동성애 작품의 계보를 정리, 연구했다는 전적을 고려하여 그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망명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가정하고 내용을 전개한다.

주2) 1945년 이전까지 제 1차 세계대전을 대신해서 사용된 용어. 제 1차 세계대전,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칭호는 1945년 이후에 고안·일반화 된 것이고, 그 전의 전간기(戰間期)에는 1914~1918년의 전쟁을 흔히 ‘대전쟁(Great War)’라고 불렀다.

주3) 현재의 조지아(국가). 1801년에 러시아에 의해 병합된 이후 러시아식 명칭인 그루지야로 불렸으나, 2008년에 독립한 후 현재는 영문 명칭인 조지아를 국명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주4) 코카서스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위치한 코카서스 산에서 유래했으며, 현재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그루지야)가 이 지역에 속한다. 백인종의 또 다른 학술 명칭인 코카시안(Caucasian)은 이들의 선조가 이 지역(Caucasia, Caucasus)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에 착안하여 붙여졌다.

주5) 아르고 원정대 설화에 등장하는 메데이아의 고향 콜키스가 이곳 그루지야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6) 콜키스의 왕녀였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황금양털을 획득할 수 있는 세 가지 계책을 알려주는 대신, 그리스로 귀환할 때 자신을 함께 데려가서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알려준 비책을 사용해서 콜키스 왕의 황금양털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콜키스의 왕이 군대를 보내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뒤를 좇도록 명령한다. 아버지의 추적이 있으리란 사실을 미리 예상했던 메데이아는, 남동생을 아르고 호에 함께 태운 다음 살해하여 그 시신을 여덟 토막으로 잘랐다. 그리고 아버지 군대의 함선이 뒤쫓아 올 때마다 그 시신을 한 조각씩 바다로 던져 넣었고, 콜키스 왕의 군대는 죽은 왕자의 토막이 떨어질 때마다 그것을 수습하며 뒤쫓아 가느라 결국 메데이아와 이아손을 놓치고 만다. 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아카넷, 2010, pp.249~252.

주7) 황금양털 쟁취에 성공한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이후 에게 해의 섬을 전전하다가 코린토스에 정착한다. 문제는 이곳에 정착한 이아손이 코린토스 왕인 크레온의 딸과 재혼하여 왕위를 이어받고자 하는 욕심을 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자신과의 맹세를 깨트린 것에 분노하여 크레온 왕의 딸을 죽이고, 이아손의 눈앞에서 그와 자신 사이의 두 자식마저 직접 살해하여 그의 대를 끊어버렸다. 전설에 따르면 이후 메데이아는 콜키스로 돌아가 삼촌으로부터 왕권을 빼앗아 아버지에게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한편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떠난 다음 지난 날의 영광을 회고하며 살다가, 몇 년 후 옛 아르고 호 아래 앉아 쉬던 중 뱃머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진성, 같은 책, pp.252~253.

주8) 에우리피데스, 송옥 역, 『메데이아』, 동인, 2005, p.49

주9) 파리어와 콜린스가 인용하고 있는 대사는 조나단 라슨의 1996년 작 뮤지컬 《렌트》의 넘버 〈I’ll Cover You〉의 가사이다. 물론 이 글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작중 시점으로부터 50년 후에 제작된 뮤지컬의 노래를 알 리 없으나, 공교롭게도 해당 극에서 위 노래를 부르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콜린스(Collins)이다.

주10) ‘오리엔트’라는 용어는 ‘동양’만큼이나 모호하며 서구중심적인 용어이다. 가령,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동양’ 혹은 ‘오리엔트’라고 불러야 하는가?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사용됐던 ‘오리엔트’는 근동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인도나 파키스탄을 아우르는 남아시아를 가리키는 것인가? 동남아시아나 한·중·일이 있는 동아시아는 과연 서구인들이 말하는 ‘오리엔트’에 포함되는가? 이러한 모호한 질문들이 드러내듯이, ‘오리엔트’나 ‘동양’은 근대 유럽인이 ‘동양’이라는 타자 설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하려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발명해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오리엔트’ 용어를 비판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제국주의 시기 동안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뤄진 ‘오리엔트’ 용어 형성과 서구 정체성의 형성에 관해 연구한 바 있다. 이처럼 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식민주의 비판을 고려하자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양인’으로서 ‘오리엔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글의 주인공인 파리어가 1940년대 영 제국주의 말기를 살아간 군인이라는 점, 따라서 그가 태어난 사회적 맥락이라는 환경적 영향을 받아서 ‘오리엔트’라는 용어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사용했으리라고 가정하여 사용한다.

주11) 『1984』, 『동물농장』의 저자로 유명한 조지오웰은 본래 영국 중류계급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그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장학생으로 이튼스쿨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튼스쿨에서의 생활을 겪으면서 그는 영국 본토의 계급차별에 대해 심한 환멸을 느꼈고, 졸업 후에는 다른 졸업생들처럼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대신 제국 경찰에 지원하여 이후 5년 간 버마(현재의 미얀마)에서 제국 식민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나 오웰은 식민지에서의 경찰 업무를 맡는 동안 오히려 영 제국주의의 모순과 부당성을 체감했으며, 결국 안정적인 제국 경찰직을 그만두고 본토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린다. 이후 그는 신문사 기자 및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이 기간 동안 출간한 르포르타주 문학 『버마 시절』, 『위건 부두로 가는 길』, 『파리와 런던의 지하 생활』 등에서 그의 영 제국주의 비판 및 영국 계급의식 비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단, 버마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그의 식민주의 비판조차 ‘동양’을 ‘여성성’으로 직접 치환하는 등의 기존 서구 중심주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한계점을 안고 있다.

주12) 1937년 스페인에서 왕당파(프랑코)와 좌파 공화정부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자, 조지 오웰 또한 헤밍웨이 같은 다른 저명한 좌파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인민전선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이때의 경험을 다룬 저서로는 1938년에 출간된 『카탈로니아 찬가』가 있으며, 이 책에서 오웰은 공산당과 나치당의 파시즘이 공통적으로 전체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음을 간파·지적했으며 이로 인한 대전쟁의 발발 및 향후 스탈린 독재의 등장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주13) 항공모함의 원시적인 형태는 1910년대 영국 해군에 의해서 처음 고안되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전략에 운용, 보급·생산한 주체는 2차 대전 참전기의 미국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경쟁적으로 거대한 항공모함을 건조해서 그 위에서 직접 전투기를 출격시키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이를 통해 태평양의 외딴 무인도에 기지를 세우지 않고도 바다 위에서 바로 전투기를 이륙시킬 수 있었다.

주14) 1943년 작 뮤지컬 영화 《Swing Fever》에는 〈One Girl and Two Boys〉라는 흥겨운 스윙재즈 곡이 등장한다. 해당 장면에서 여자 댄서 역을 맡은 Jean Veloz는 Marilyn Maxwell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맞춰서 두 남자 파트너인 Don Gallager 및 Lenny Smith와 함께 스윙댄스를 추며, 세 배우가 합을 맞춘 이 댄스씬은 2차대전기 미국에서 유행한 스윙 댄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15) 앙드레 지드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야간비행』 서문에 부쳐 1920년대의 야간 우편비행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항공 수송 회사는 다른 수송 회사와 속도 경쟁을 하는 것이 문제였다. (…) 애초에 많은 논란이 일었던 야간 정기 비행은 차츰 허용되어 위험한 실험 기간을 거친 뒤로 마침내 오늘날에는 실용화되기에 이르렀으나, 이 소설에 다루어질 때만 해도 아직은 대단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뜻밖의 사고가 많은 항공로의 예측 못할 위험에, 밤의 위험한 신비까지 보태져 있었던 것이다. (…)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항공에 있어서도 영웅적인 초기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시기에 하늘을 개척한 이들 중 한 사람의 비극적인 모험을 묘사하고 있는 『야간비행』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사적 색채를 띠고 있다.”

생텍쥐페리, 이원희 역, 『야간비행』, 소담출판사, 2001, pp.10~11. 앙드레 지드의 서문에서 발췌.

주16) 여기서 콜린스가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모두 『야간비행』에 나오는 두 허구적 인물인 펠르랭 조종사와 파비앵 조종사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 생텍쥐페리나 그의 친구 기요메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실제 파타고니아 노선의 담당자였던 기요메는 1930년 안데스 산맥에서 실종되었으며, 생텍쥐페리 본인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44년 7월, 지중해 상공을 정찰하던 중 독일군 전투기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17) 『인듀어런스 호』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전설적인 섀클턴 탐험대의 남극 탐험기는 이곳 파타고니아 푼타아레나스에서 출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대부분의 남극 탐험가들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의 남단에 위치한 파타고니아까지 육로 혹은 항공을 통해 도착한 다음, 푼타아레나스 항에서 배로 갈아탔다. 북극권을 지나가는 항로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개척된 것에 비해, 남극권을 지나가는 비행로는 늦은 시기까지 제대로 상용화되지 못했다.

주18)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브루스 채트윈은 실제로 파타고니아 지역을 여행한 후, 1977년에 그 여행의 결과물인 『파타고니아』를 출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년 시절 조부모의 거실에 걸려 있던 짐승 박제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하여 남미의 가우초, 소몰이꾼, 원주민, 아르헨티나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수시로 오가며 논하는 그의 서술 방식은 현대 여행문학에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채트윈이 태어나던 해에 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파리어가 그의 존재나 이 독특한 여행기를 현실적으로 알았을 리는 당연히 만무하다. 그러나 이즈음이 되면 독자들도 짐작했을 테지만, 이 글에서 실제 역사와 이야기 간의 현실성이나 시공간의 구체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중요한 핵심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cockt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