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미식회

도마뱀님께





“아, 출출하다.”

길게 하품을 늘어뜨린 피터가 혼잣말을 했다. 딱히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두 눈이 흘낏거리는 벽걸이 시계의 시침은 밤 11시를 넘어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학년들에게만 허용된 거실에서 노닥거리며 밤늦게까지 케이블 영화를 시청하던 커트, 진, 그리고 쥬빌리의 눈도 시계에 꽂혔다. 밤 11시 30분. 다섯 시간 전에 먹었던 저녁 식사는 튼튼한 십대의 위 속에서 벌써 소화 돼서 손끝 발끝까지 전달됐을 시간이다.

“우리 저녁에 찹 스테이크 먹었거든?”

쥬빌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뇨끼도 먹었지.”

“알프레도 소스 올려서.”

진과 커트가 차례차례 숟가락을 얹었다. ‘꼬장꼬장한 것들.’ 피터는 표정을 구기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차마 저 셋─특히 진─한테 말대꾸할 용기는 안 나고, 애먼 커트 쪽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야, 넌 배 안 고프냐? 햄버거? 맥 앤 치즈?”

“어, 어…… 오늘부터 사순절인데……”

신실한 커트는 밀려오는 자본주의의 유혹과 독실한 신앙 사이에서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다.

“쓰읍— 친구. 여긴 미국, 음식의 천국. 냉장고 문을 열면 거기가 주님의 천국. 오케이?”

순하디 순한 양 같은 이주 유학생을 악마의 케이크로 꼬셔내려는 작태를 보다 못한 진이 대신 나섰다.

“주님의 천국이 아니라 지방의 천국.”

“피터는 이제 꺾인 오십이라서 밤에 먹으면 뱃살 쪄.”

시니컬한 진의 말 뒤로 발랄한 쥬빌리의 목소리가 재차 피터를 공격했다. 특히 깜찍하고 발랄한 얼굴로 가슴을 쿡쿡 찌르는 신랄한 독설을 퍼붓는 쥬빌리의 공격이 크리티컬이었다. 피터는 커다란 두 눈에 억울함을 가득 담아 항의했다.

“반 오십 아니거든? 뮤턴트 백 세 시대거든? 나 아직 쿼터거든?”

“에이, 그건 아니지. 피터가 아무리 동안이어도 위는 동안이 아니라서 지방 분해 속도는 벌써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스물 넘으면 지방 분해하는 세포가 줄어든대.”

“증거 있어? 증거 있어?”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봤는데.”

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니 소용이 없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나이로 공격받은 것에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피터는 괜히 가만히 앉아 있던 커트를 반쯤 강제로 일으켜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 먹기 싫음 말던가! 나랑 커트는 먹을 거거든?”

“아니, 난 안 먹ㅇ……”

“미국에 왔으니 미국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며? 미국에서는 밤에 피자를 먹으면서 우정을 쌓지.”

당당하게 사기를 치며 커트를 끌고 가는 철없는 오빠 뒤로 날카로운 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괜히 부엌 어질렀다가 사람들 깨우지 말고, 그냥 시리얼이나 먹어! 내일 아침 설거지 당번 교수님이야.”

모범적이지 못한 (나이로는) 최고참 학생은 들은 척 만 척 손만 휘휘 저으면서, 남은 한 쪽 손은 커트의 어깨에 걸친 채로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거 참. 그깟 설거지쯤 자비에 아저씨한테 들키기 전에 미리 해 놓으면 될 거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1층의 공용 주방에 내려갔는데,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 교수님 여기서 뭐 하세요?”

놀란 커트가 눈치 없게 냉동고 안을 뒤적거리던 찰스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물어봤다. 아무래도 새벽에 몰래 설거지를 하게 될 일은 없어보였다. 공범이 생긴 모양이었으니까.

“전에 교수님이 밤에 몰래 음식 훔쳐 먹는 사람은 벌점이라고……”

굳은 찰스의 등 뒤에서 순진하게 사실을 까발리려는 커트의 입을 피터가 급히 막았다. 그리고 불쌍할 정도로 솔직한 학우를 위해 자비에 스쿨의 중요한 생존법 하나를 급히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하루 동안 네 살짜리 꼬맹이 되고 싶은 거 아니면 입 다물어라, 동생.’

저 아저씨 완전 무서운 사람이야. 혹시 들릴까봐 입모양으로 덧붙여 주었는데, 이미 들킨 모양이었다. 얼굴 가득 인자한 웃음을 띠면서 돌아본 찰스는 마찬가지로 인자한 목소리로 커트의 정직한 질문에 의뭉스러운 척 가식을 떨며 답변해주었다.

“훔쳐 먹다니, 무슨 소리니 커트? 선생님은 요새 밤에 몰래 냉장고를 뒤지는 학생이 출몰한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사를 하러 온 거야. 밤에 몰래 부엌을 쓰다가 불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려나 싶은 마음에 걱정이 되어서……”

“뒤에 있는 그 냉동 봉지는 뭐죠, 아저씨?”

남들보다 네 배 더 빠른 피터의 동체시력은 몰래 닫히려는 냉동고 사이로 보이는 빨갛고 동그란 물체를 놓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남들보다 네 배 더 무서운 능력을 가진 찰스도 이번만큼은 학생 둘에게 살짝 능력을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한 번 잡은 고리를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물어오는 재빠른 청년 때문이었다. 피터는 커트를 따라 순진한 목소리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껄렁한 태도로―물었다.

“그거 내일 점심에 쓰려고 에릭이 반죽해놓은 햄버그 아니에요?”

살코기를 잘게 다져서 계란과 함께 반죽한 다음, 영양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잘게 썬 당근과 양파도 같이 넣어서 동그랗게 랩으로 쌓아 정성스레 쌓아놓은 그것은, 분명 오늘 낮에 에릭이 내일 점심에 쓰겠다면서 미리 준비해 놓은 햄버그 반죽이 분명했다. 미스틱의 공포스러운 훈련을 피해 땡땡이를 치던 피터가 우연히 부엌 앞을 지나가다가 공중을 떠다니는 식칼과 자동으로 돌아가는 믹서와 도깨비 방망이를 본 것이니 확실했다. 위험한 날붙이와 그릇들이 떠다니는 가운데 도마 위에서 자동으로 잘게 썰리는 쇠고기를 보면서 오싹 소름이 돋았더랬다. 미스틱은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무서운 사람인 게 아닐까, 사실.

“아하, 피터. 그때라면 분명 레이븐의 훈련이 있는 시간이 아니었니? 이번에도 훈련에 빠진 걸 알면 레이븐이 엄청나게 화낼 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걔가 화나면 은근히 무서운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그거 에릭이 낮에 만든 햄버그 맞는 거네요.”

심드렁하게 대꾸해오는 피터의 말에 찰스는 더 이상 반박할 패가 없었다. 

‘누가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이런 데서 아주 집요하기는.’

찰스는 왕년에 한 성질 하던 것이 속에서 끓어오르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런데 이 ‘싹수없는 다 큰 제자’는─찰스는 학교 안을 어슬렁어슬렁 지나다니는 이 한량을 볼 때마다 싹수없는 녀석이라고 아주 크게 불러주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에릭과의 원만한 관계 회복을 위해 애써 참고 있는 중 이었다─마지막 일격타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와, 그거 에릭이 내일 우리 먹인다고 두 시간 동안 만든 건데.”

굳이 ‘우리’에 강조까지 넣어가면서 입을 삐죽이는 행태에 찰스는 자신이 수세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휴전 협상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 하긴 나도 너희 나이 때는 식욕이 엄청났단다. 밤에도 햄버거 하나쯤은 거뜬히 해치웠지.”

찰스가 냉동고에서 봉지를 두 덩이 더 꺼내서 기름 두른 팬 위에 올리면서 말했다.

<이쯤에서 타협 보자, 피터.> 굳이 머릿속으로 전달하지 않아도 피터는 자비에 교수의 눈빛만 보고서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더 건드렸다가 정말로 침 질질 흘리는 네 살 꼬맹이가 되고 싶지 않았던 피터는 둘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커트의 손을 잡아챈 다음, 조용히 식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육즙 가득한 햄버그가 지글지글 타는 소리와 주방 안에 퍼지는 고소한 냄새를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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