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 및 윤문 주의. 영고샘 주의. 보살 샘 주의. 샘 같은 친구 하나 있으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Making a Splash!   by roe87

Chapter 1 끝. 









비록 지난밤의 영향으로 아직 피로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이토록 평화롭고 꿈조차 찾아오지 않는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스티브에게는 놀랍게만 느껴졌다. 잦은 악몽 탓에 편히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는 그를 보고서 언젠가 나타날 미래의 파트너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는 했으니, 꽤 심각한 정도였다. 물론 그런 스티브와 몇 년째 같이 살고 있는 샘은 그의 불면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제대 군인 출신이었던 만큼 스티브의 처지를 이해할 여지가 있었다.

스티브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의 무의식 속으로 낯익은 초조한 꿈들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스티브는 어느새 군인이 되어 분대원들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등장인물은 옛 전우로 바뀌기도 했고 해상경비대 동료들의 얼굴로 바뀌기도 했다. 때로는 그 모든 사람들이 뒤섞여 나타났다. 어머니, 아버지, 동료들. 그가 책임감을 느끼는 대상이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잘 풀리지 않은 관계의 옛 애인까지도. 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종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떠나고 만다.

악몽이 더 어둡고 위협적인 형상으로 변하려던 찰나, 문득 부드럽게 노래하는 음성과 머리맡을 쓰다듬는 손길이 그를 멈춰 세웠다. 이마 위로 내려앉는 손길은 낯설었음에도 부드러웠다. 스티브의 의식은 끔찍한 악몽들 사이를 물 흐르듯 지나쳐 다시 깊은 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간만에 누리는 안락이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여느 때처럼 얼굴을 내리 쬐었다. 혼미했던 머리가 점차 맑아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꿈에서 들었던 바로 그 가락을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포근하고 낮은 목소리가 빚어내는 소리는 오래된 노랫말이었다.

스티브는 눈을 깜빡이며 베개에 파묻었던 뺨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정체 모를 갈색 머리의 남자, 버키였다. 그는 첫째로 버키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로는 그런 버키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자기와 같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 안녕.”

스티브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멈췄다. 옅은 빛깔의 홍채가 미끄러지듯 시선을 돌려 스티브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너…… 진짜였구나.”

스티브가 망연히 내뱉었다.

“나 아직 꿈꾸는 거 아니지?”

버키의 입술이 씰룩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었고 파란 두 눈은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만약 사정을 잘 몰랐더라면 무심코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들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 저, 그러니까……”

스티브가 베개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비벼내고 까치집이 된 머리를 가라앉히려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어수선해 보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침 만들어 줄까? 밥?”

스티브가 음식을 먹는 흉내를 내면서 물었다. 그러나 버키는 어제와 같은 생글거리는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서 불쑥 스티브한테 몸을 던졌다.

“아니면 그냥 안고 있는 것도 좋고, 응…… 하하……”

스티브로서는 그런 버키를 받아주며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건네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다.

꿈같은 상황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데이트 상대와 아침을 같이 맞이한 적이 없었고 이토록 편안하고 익숙하게 누군가와 어울린 적도 없었다. 비슷한 기억이나마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가 맺어온 관계 전반이 다 그러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스티브의 행동과 어조 하나 하나에서는 결국 어색함이 새어 나오곤 했으니까. 심지어 버키를 앞에 둔 지금조차 약간의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버키는 그런 스티브의 상태를 놓치지 않았다. 버키는 더더욱 스티브의 품속으로 파고들어서는 예의 멜로디를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있던 터라 그의 성대가 만들어내는 떨림까지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었다.

“듣기 좋다.”

스티브는 눈을 감은 채로 어느새 그 가락을 따라 몸을 흔들고 한쪽 팔로는 버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꿈에서 들은 적이 있어. 근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스티브의 말에 흥얼거리던 허밍이 끊겼다.

“뱃사람의 노래.”

돌아오는 대답에 스티브는 눈을 번쩍 떴다. 노래는 이어졌다. 한 뼘도 움직이지 않은 버키 옆에서 스티브가 당황해서 방 천장만 멀거니 올려다봤다.

겨우 정신을 차린 스티브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방금, 방금, 네가 말……? 잠깐, 내가 하는 말 알아듣는 거야?”

다시 노래가 멈췄다. 버키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고는 차분한 눈빛으로 스티브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응.”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아주 여상하고 간단한 어조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스티브는 급하게 얽었던 팔을 풀어내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영어 할 줄 안다고?”

스티브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추궁을 받은 버키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태연하게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

“세상에.”

스티브는 숨을 훅 들이켰다.

“약간이라고? 그래, 약간이란 말이지.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려줘서 그거 참 고맙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당연히 못 알아들을 거라 믿고서 어젯밤에 버키 앞에서 얼마나 많은 헛소리를 지껄였던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끄러움으로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스티브는 걸칠 옷가지를 찾고, 요깃거리라도 좀 만들어야겠다고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허둥지둥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티셔츠 밖으로 머리를 빼내던 스티브는 겨우 용기를 내서 다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버키를 향해 물었다.

“큼, 흠흠, 아까 질문 말인데, 어떤 게 좋아……?”

그러나 뒤로 갈수록 말꼬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버키는 꼭 그림 모델처럼 한쪽 손을 머리에 기대고서는 옆으로 길게 누워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그 장면을 화폭에 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을 안 그려본 지가 수년째였다.

“저, 버키?”

스티브는 헛기침을 하며 억지로 주의를 끌었다.

“아침으로는 어떤 게 좋아?”

버키는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곧바로 이불을 옆으로 치워버리고는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려 반쯤 선 자신의 물건을 한손으로 그러쥐었다.

“음,”

자기 침대 위에서 천천히 수음을 시작한 연인을 못 박힌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던 스티브는 하려던 말도 잊고 말았다.

“저, 버키?”

버키는 스티브를 향해 살짝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머리를 받치고 있던 나머지 한 손을 풀어내어 스티브를 향해 손짓했다.

“그래, 하자.”

기껏 입었던 옷을 다시 벗어던진 스티브가 서둘러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연인이 그런 그를 두 팔로 받아주며 작게 킥킥거렸다.






샘 윌슨은 자기 정도면 꽤 괜찮은 룸메이트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스티브와 알고 지낸지 벌써 수년이고 같이 산지는 두 해를 넘겼다. 그 동안 아무런 갈등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스티브는 지나칠 정도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어서 다 쓴 머그컵을 아무데나 놓고 다니는 버릇도 없었고 심지어 침대에 들기 전에 직접 씻어놓기까지 했다. 바로 그런 과거 때문에 샘은 어젯밤 집에 돌아왔을 때 발견한 난장판을 눈감아줬고 서비스로 잘 준비를 하기 전에 직접 대신 치워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스티브의 방에서 들려오는 매우 리드미컬한 쿵쾅거리는 소음과 가끔은 뭔가에 부딪치기까지 하는 소리를 향해 불만을 터뜨리는 대신, 심신 안정에 효과가 좋은 파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들리는 소리로 판단해보건대 그의 친구는 아무래도 평생에 다시없을 아주 격렬한 운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샘은 절대 이번 기회를 들볶지 않고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는 스티브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의 친구는 다른 누구와 데이트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데다 특히 최근에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샘이 기억하기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어디서 우연히 만난 다음에 치밀하게도 그동안 내내 비밀로 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마 밤에 몰래 나가서 둘이서 바닷가 산책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침내 아침이 되고 샘은 혼자 방에서 기어 나오는 스티브를 구경하면서 잔뜩 웃을 수 있었다. 부엌으로 굴러들어오는 스티브는 어디 한 군데 부스스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목에는 물린 자국이 곳곳에 적어도 큰 것 하나 이상 남아 있었다.

“좋은 아침.”

샘이 이를 환히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까지 혼비백산한 스티브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스티브는 아주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어서 항상 다른 어느 사람보다도 먼저 일어나 있고는 했다.

“좋은 아침, 샘.”

스티브가 머그잔과 커피포트를 집어 들며 웅얼거렸다. 컵에 커피를 따르는데, 반은 따르고 반은 카운터 위에 흘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뒤늦게 알아차린 스티브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갈 곳 없는 짜증을 부렸다.

자기 몫의 커피를 홀짝이며 그런 스티브를 구경하던 샘은 웃지 않기 위해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스티브는 엎질러진 커피를 행주로 닦고 나서야 다시 잔을 들었다.

“샤워 먼저 쓸게.”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쏟아내며 말했다.

“스티브. 그냥 다시 침대에 가서 눕기나 해. 클린트한테 연락해서 오늘 교대 근무 쉰다고 말해놨으니까.”

“뭐? 괜찮아.”

그러나 저항하려고 벌어진 입에서는 다시 하품만 나왔다. 그는 문설주에 부딪치기도 하고 들고 있던 남은 커피를 바닥에 흘리기도 하면서 비틀비틀 현관을 걸어갔다. 떠나는 스티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샘은 고개를 푹 저으면서 대신 바닥을 닦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마친 스티브가 욕실에서 나왔다. 어깨 위에 LA 카운티 해상경비대 장식을 덧대고 반쯤 햇볕에 그을린 근무복은 단추가 삐뚤빼뚤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은 들어가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래도 최소한 바지는 입고 있네.’

샘이 생각했다. 그는 달래듯 스티브의 이름을 불렀다.

“스티브, 오늘 하루 휴가 내. 괜찮아, 괜찮아. 월차 한 번도 쓴 적 없었잖아? 이러고 다니는 걸 퓨리나 힐한테 들키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을 걸.”

“아냐, 출근할 거라니까.”

스티브는 아직 잠이 덜 깼을지는 몰라도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 내……”

열쇠를 찾다 말고 말을 멈춘 스티브가 잠시 머뭇거렸다.

“내…… 어, 그러니까 버키 말인데, 혹시 깨면—”

“잠깐만, 잠깐만.”

샘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부엌 카운터 위로 스윽 팔을 기대고 섰다.

“버키라고?”

스티브는 샘의 시선을 피했다. 양쪽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응. 이름이 버키래.”

샘은 이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게 별명이야? 50년대에 만들던 그 곰인형 버키의 버키?”

“그게……”

스티브는 당황해서 말을 허둥댔다.

“그냥, 보게 되면 나 교대근무 끝나고 돌아온다고 전해 줘. 메모 남겨놓기는 했는데…… 그렇게 영어를 잘 읽는 것 같진 않아서.”

“걱정 마. 일어나면 말해둘 테니까. 이따 바다에서 보자고.”

“고마워, 샘. 좋은 하루 보내고.”

“스티브, 잠깐만.”

나가려던 스티브를 샘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흘러내린 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옷 좀 어떻게 해보지.”

스티브의 얼굴이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급히 셔츠의 버튼을 다시 채운 스티브는 문밖으로 날아가듯 도망갔다.

“고마워, 나중에 봐.”

멀어지는 스티브의 등 뒤로 샘이 외쳤다.

“도착하면 커피 좀 더 마셔!”



스티브가 떠난 아파트는 고요했다. 반시간 뒤에서야 욕실의 샤워기가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의 데이트 상대가 틀림없었다.

그가 샤워를 하는 동안 샘은 외출할 준비를 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휴가를 받은 김에 처리할 일이 몇 가지 있었고, 볼 일을 보고 난 후에는 피에트로, 완다 남매와 함께 망할 스콧을 상대로 배구 한 판을 벌이기로 약속해뒀다.

그러나 삼십 분이 지나도록 스티브의 데이트 상대는 샤워 부스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확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봐. 거기 별 일 있는 거 아니지? 난 스티브 룸메이트고 그냥 샘이라고 부르면 돼.”

샘이 욕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쳐 물었다. 그러자 물소리가 그쳤다.

“우리 어제 잠깐 만났었는데.”

샘이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스티브의 놀이 상대, 그러니까 버키가 나타났다. 버키는 다 벗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워워, 잠깐만.”

샘이 급히 눈을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또 벗고 있네. 수건이라도 하나 둘러주면 안 되겠어, 제발?”

그가 세탁 바구니 안에 가지런히 놓인 깨끗한 타올 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그냥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인데, 왜 이런 시련을……”

어쨌든 버키는 아주 과묵한 타입이 분명했다. 그는 입 한 번 뻥끗 않고 샘만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난 이만 나가본다.”

어색해진 샘이 뒤로 물러났다. 버키는 그저 눈썹만 치켜 올릴 뿐이었다.

“여기 잘 있을 수 있지? 나가기 전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갖다 줄까? 스티브는 나중에 돌아올 거야. 커피 마음대로 마셔도 되고, 음식도 먹고 싶은 대로 가져다 먹으면 돼.”

그렇게 말하며 샘은 다시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어깨 뒤로 슬쩍 돌아다보니 버키가 뒤에서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허리에 커다란 타올 하나를 두르고 있었다.

“좋아, 그거 괜찮네. 거봐, 조금씩 적응하고 있잖아. 그런데 머리에 쓸 수건 하나 더 필요하지 않아?”

샘이 버키의 젖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닥에 물 다 흘리고 있―”

그러나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버키가 먼저 허리에 둘렀던 타올을 풀어서 머리 위에 올렸다. 샘은 빛의 속도로 몸을 돌리며 다시 한 번 남자의 듬직한 그곳으로부터 황급히 시선을 피해야 했다.

“아, 제발 좀! 그런 뜻이 아니라! 거기 좀 가리라고.”

너무 놀라서 홱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샘은 버키의 얼굴 위에 떠오른 교활한 미소를 놓치고 말았다.



“나 진짜 나간다.”

샘이 열쇠를 집어 들며 투덜거렸다.

“실내 노출에 관해서 나중에 스티브랑 얘기 좀 해야겠어. 모든 공동 구역에서는 반드시 속옷을 착용할 것. 새 룸메 규칙이야!”

그렇게 나가려는는데, 버키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스티브?”

“음? 스티브는 일 나갔어.”

샘은 실수로라도 버키의 아래쪽과 시선을 마주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직장 말이야, 직장.”

샘이 덧붙였다.

“조금 있다가 돌아온대.”

그러나 아무리 나가려고 해도 버키는 막무가내로 방해하며 구슬프게 물어볼 뿐이었다.

“스티브?”

매우 어리석은 짓인 걸 알면서도 샘은 결국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나 지금 해변 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같이 나가면 볼 일 다 끝난 다음에 스티브한테 데려다 줄게.”

버키는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스티브 말이야, 스티브. 그런데 뭐라도 걸쳐야 데리고 가 줄 거야. 우리 해변은 누드 비치가 아니거든?”



아무리 샘만큼 침착하고 차분한 성정의 사람이라 해도, 버키를 데리고 일을 보러 다닌다는 건 매우 우습고 진 빠지는 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만약 사정을 잘 몰랐다면 샘은 버키가 일부러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난동을 부린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러나 버럭 화를 내기에는 버키의 소처럼 커다란 눈이 너무 순진해보여서 차마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옷은 입히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버키는 기나긴 실랑이 끝에 겨우 샘이 빌려준 형형색색의 수영 쇼츠와 낡은 티셔츠를 얌전히 걸쳤다. 스티브의 옷을 입혀보려고도 했지만, 너무 꽉 끼어서 맞질 않았다.

쪼리도 신겨봤지만, 버키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빤히 보더니 슬쩍 발을 집어넣고는 아주 우스꽝스럽게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걷다가, 결국 샘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벗어 던져버렸다.

버키가 맨발이라는 사실을 샘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로건의 스쿠버 다이빙 가게에 도착했을 때였다.

“야, 너 신발은 어쨌어?”

샘은 분명히 얌전히 신겨있어야 할 샌들을 찾으려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절대, 절대, 옷은 벗지 마.”

결국 잔소리가 이어졌다.

“맨발로 다니는 건 뭐라고 안 하겠지만, 그 망할 옷은 꼭 입고 있어. 안 그러면 이번엔 진짜 경찰들이 끌고 간다.”

로건이 그런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새 친구?”

“내 친구 아냐.” 샘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스티브 친구지. 그리고 조만간 얼른 스티브한테 치워버릴 거라고.”

“그렇단 말이지, 흠.”

로건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며 대답했다.



옆에 있어야 할 버키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챈 것은 한창 지프차 트렁크에 새 장비를 싣고 있을 때였다. 가게의 작은 주차장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샘은 잠시 후, 차들이 질주하는 사거리 코앞에 서 있는 버키를 발견했다.

“멈춰, 멈추라고!”

혼비백산한 샘이 팔을 크게 휘두르며 번개처럼 뛰쳐나갔다. 다행히 버키가 차로로 들어가기 전에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아, 진짜!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버키의 팔을 잡아챈 샘이 그를 다시 차 옆으로 끌고 오며 화를 냈다.

“망할, 목줄을 채워놓든가 해야지 진짜.”

샘이 시부렁거리는 소리에도 버키는 대꾸 하나 없었다. 대신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며 물었다.

“스티브?”

“그래, 스티브 저기 있어.”

샘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있잖아. 장은 나중에 봐도 되니까 지금 당장 스티브한테 가자.”

샘은 지프차 위로 버키를 번쩍 끌어올려서는 자기 옆의 조수석에 앉혔다.

“안전벨트 매, 안전벨트.”

샘이 단단히 일렀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이봐, 클린트. 난데. 로저스 거기 있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을 들은 샘은 다시 한 번 이마를 짚었다. 스티브는 몰래 사무실 한 구석에 숨어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중이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혹시라도 사무실에 들를 퓨리한테 조는 모습을 들키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다 싶어서 클린트가 옮겨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 즉, 지금 저 호기심 많고 말썽대마왕인 버키를 스티브한테 맡겼다가는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승진을 앞두고서 수많은 상관들의 이목이 스티브에게 쏟아지고 있는 만큼, 그는 괜히 버키한테 정신이 팔려서 애먼 짓을 저지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신경 쓰지 마.”

샘이 클린트에게 말했다.

“나 대신 스티브한테 너 진짜 나쁜 놈이라고 좀 전해줘. 그리고 깨면 바로 연락하라고도.”

“라져 댓.”

수화기 너머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은 샘은 운전석에 털썩 앉았다.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제발 스티브이기를 기도했건만 안타깝게도 전화는 완다한테서 온 것이었다.

“왜 뭐. 무슨 일이야.”

샘이 전화를 받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샘! 아직 출발 안 했으면 나 좀 태워줄 수 있어요?”

완다가 들떠서 소리쳤다.

“너희한테 난 대체 뭐니? 콜택시?”

그렇지만 결국 샘은 비꼬는 것을 멈추고 기꺼이 완다의 부탁을 승낙했다.

“알았어, 알았어. 빨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이십 분 안에 도착할 테니까.”

“이십 분이요? 하지만, 머리도 땋아야 하고―”

“딱 이십 분이야!”

샘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버키를 곁눈질하며 혼잣말했다.

“내가 저러기 싫어서 머리 짧게 자르고 다니는 거야.”



결국 완다가 마저 나갈 준비를 끝마치는 동안 샘은 버키를 데리고 완다의 아파트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또 갑자기 사라지지 못하도록 현관문을 제대로 잠갔는지 확인한 다음에서야 샘은 겨우 카우치 위에 두 발을 뻗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완다가 커피를 끓여서 내오자, 버키는 샘이 미처 발견하고 제지하기도 전에 혼자서 세 잔을 끝내버렸다.

“안돼안돼안돼, 제발. 얘 지금도 쌩쌩한데 여기서 더 팔팔해지면 나 진짜 죽는다.”

샘은 잔뜩 구겨진 버키의 얼굴을 가볍게 무시하며 한쪽 손에서 컵을 빼앗아 치워버렸다.

“그나저나 왜 샘이 스티브 애인이랑 대신 놀아주고 있는 거예요?”

머리를 땋아 내리던 완다가 웃으며 물었다. 질문을 받은 샘은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난 그냥 배달부야. 기회만 왔다 봐라, 바로 스티브한테 던져줄 테니까. 지 애인은 지가 챙기라고 해.”

“샘, 그건 좀 말이 심했어요.”

완다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ㄴ……”

그러나 완다의 말은 그녀의 작은 부엌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버키를 발견하면서 끊기고 말았다.

“아마 배가 고픈가 보네요.”

프랑스식 땋기를 마친 완다가 일어서서 버키 곁으로 갔다.

“아침 먹을래요?”

“아침이라고?”

샘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 한 시도 훨씬 넘었거든.”

완다는 그런 샘의 말을 무시하며 버키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 만들어 줄게요.”



세 사람은 사십 분 후에야 비로소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내내 완다는 샘에게 버키가 그녀의 식재료를 얼마나 많이 거덜 냈는지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고, 샘은 간단하게 “로저스한테 영수증 청구해!”라는 한 마디로 그녀의 불평을 일축했다. 반대로 샘은 피에트로는 왜 이리 늦는 거냐며 완다를 대신 닦달했다.

차를 세우자마자, 샘은 뒷좌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버키를 팔로 쿡쿡 찔러서 깨워야 했다. 버키는 방금 전에 먹어치운 팬케이크의 후유증으로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여차저차 겨우 차에서 내린 세 사람은 나란히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미리 일러둘 게 있는데,”

따뜻한 모래사장에 발바닥을 내려놓자마자, 샘이 완다에게 말을 걸었다.

“스티브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기는 하지만, 계속 피에트로가 안 나타나면 난 당장 본부에 가서 스티브 녀석한테 이 인간 메뚜기를 넘겨줘야겠어.”

“스티브가 직접 데리러 오면 안 돼요?”

완다가 손가락으로 배구공을 돌리면서 물었다.

“좋은 질문이야.”

샘이 울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스티브 로저스께서는 매우 바쁘신 몸이고 나는 사서 고생하는 정신 나간 놈이기 때문이지.”

그들은 선탠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모래를 갖고 놀고 있는 아이들 곁을 지나 베이클럽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된 배구 네트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샘은 매의 눈으로 버키를 감시해야만 했다.

먼저 도착한 스콧이 딸 캐시와 함께 커다란 파라솔 그늘에 아래서 비치타올 위를 뒹굴고 있었다. 캐시는 엄청나게 거대한 크기의 모래성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스콧이 대신 일어나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여, 틱택.”

샘이 주먹을 맞대며 인사를 받았다.

“거기 캐시도 안녕!”

캐시가 세 사람에게 열심히 손을 흔드는 동안, 스콧은 뚱하니 서 있던 버키를 향해 의문의 손짓을 보냈다.

“저, 이쪽은……?”

“틱택, 얜 버키야. 버키, 여긴 스콧 랭.”

샘은 두 사람을 소개시킨 다음 스콧에게만 덧붙였다.

“얘가 원래 좀 말이 없어.”

“아, 그래요.”

스콧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피에트로는 어디래?”

스콧의 질문에 완다가 폰을 확인하며 대신 대답했다.

“지금 오고 있대요.”

그 말을 들은 샘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하여튼 그놈은 집중력이 여기 있는 얘보다도 더 못하다니까.”

샘이 손가락으로 버키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스콧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럼 거기 그쪽이 대신 같이 하는 건 어때요?”

“그래요, 우리 같이 해요!”

완다가 스콧의 제안에 합세하며 당황해서 굳어버린 버키를 재촉했다.

“그래, 참 잘도 하겠다.”

투덜거리면서도 샘은 어쨌든 공을 주워서 버키에게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빈 네트로 걸어갔다.

“잘 봐. 규칙이 뭐냐면…… 어허, 안 돼, 그물은 만지는 거 아냐.”

샘은 재빨리 그물에 매달린 버키를 끌어낸 다음 녀석의 주의를 끌기 위해 코앞에 공을 들이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저기 있는 스콧한테 공을 던지면 스콧이 다시 나한테 보낼 거야. 공은 땅에 닿으면 안 되고. 이해 가? 거기서 잘 보고 있어.”

그러더니 능숙하고도 가볍게 공을 툭 쳐서 그물 너머로 날려 보냈고, 공을 받은 스콧은 곧바로 다시 돌려보냈다. 돌아오는 공을 잡으며 샘이 말했다.

“좋았어. 자, 버키 이번에는 네가 한 번 해보는 거야. 이렇게 내가 던지면……”

샘이 다시 한 번 스콧한테 공을 넘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옆으로 비켜서면서 버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자, 온다. 힘껏 치면 돼.”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가리키며 샘이 말했다. 눈에는 완다의 알이 둥근 분홍색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는 뒤로 넘겨서 예쁘게 땋은 꼴이 퍽 우스웠지만, 어쨌든 버키는 샘이 가리키는 대로 열심히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곧 자세를 취하더니 공을 칠 준비를 했다. 마침내 날아오는 공을 받아쳤을 때, 버키는 그물 저 멀리— 스콧도 완다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멀리 공을 날려 보냈다.

“와, 당신 정말……”

저 멀리 날아가서 모래 위로 통통 튀기는 공을 쳐다보던 스콧이 중얼거렸다.

샘은 놀라서 눈을 깜박이더니 잽싸게 손가락으로 버키를 가리키며 못 박았다.

“얘는 우리 팀이다.”






잠에서 깼을 때 스티브는 서류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팔은 사무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얹은 채로 졸고 있는 중이었다. 불편한 자세로 자다 깨서 아파하는 그의 신음을 듣고서 누가 옆에서 웃어댔다. 그 소리를 들은 스티브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얼굴에 달라붙은 서류 더미를 떼어 냈다.

옆자리에서는 캐롤이 무릎을 꼬고 앉은 자세로 훈련 매뉴얼을 훑어보고 있었다. 캐롤은 벌써 대장 배지를 달았고, 스티브를 같은 대장 직에 추천한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스티브는 민망해져서 말꼬리를 흐렸다.

“보통 이렇게 졸지 않는데……”

“이봐, 편히 쉬어도 돼, 로저스. 오늘은 자네 대신 근무할 사람 많으니까 괜찮아.”

캐롤이 읽던 매뉴얼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목에 있는 그거, 엄청 커다란데?”

“이건……”

스티브의 손이 허겁지겁 벌어진 옷깃을 수습하기 위해 올라갔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스티브는 자신의 목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오늘은 오픈넥 티셔츠를 입어야 하는 바깥 업무 대신에 정복을 입고 있을 수 있는 실내 근무를 택한 참이었다.

“그, 그럼 전 다시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정 원한다니 못 말리겠네.”

캐롤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클린트가 오늘은 그냥 일찍 퇴근하고 가서 샘이나 찾아보라고 전해달라던데? 자네 예쁜이 데리고 있다고.”

이번에는 정말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예쁜이가 아니라 버키입니다. 그리고 먼저 퇴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찾아가면 되니까요.”

캐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 그렇지만 나 오늘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할 건데 괜찮겠어? 자네 바로 옆자리에서. 그 버키라는 남자 얘기 좀 들려주지?”

캐롤이 스티브의 목깃을 흘끗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자네 피부 톤에 맞을 것 같은 컨실러 하나 있는데. 얘기 들려주면 그냥 줄게.”

스티브는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리다가 곧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저, 다시 생각해보니까 지금 나가서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클린트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십쇼.”

“정말 컨실러 없어도 돼?”

돌아서는 스티브의 등 뒤에 대고 캐롤이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쳤다.



라커룸으로 간 스티브는 일상복인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평소보다 목 부근이 더 신경 쓰였는데, 특히 그를 찾으러 구석구석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나타샤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이닥쳤을 때는 더 했다. 나타샤는 작은 막대 화장품 하나를 꺼내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캐롤이랑 상의해봤는데, 누드나 아이보리 색이 너한테 맞을 것 같더라고.”

스티브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컨실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싱크대 위에 달린 거울 앞으로 가서 열심히 바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더 이상 민망할 수 없을 만큼 분하고 쪽팔리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다시 라커룸으로 돌아왔을 때 스티브는 제발 나타샤가 사라져 있기를 기도했다. 오늘은 그녀의 야간 교대 차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나타샤는 벤치 위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스티브가 짐을 챙기러 돌아오자 같이 따라 일어났다. 붉은색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양쪽 손에는 각각 스포츠 백과 구명 튜브를 들고, 선글라스는 끈으로 연결해서 목에 걸은 차림이었다.

“같이 내려가. 20번 망루가 비어 있어서 내가 폐장까지 지켜야 되거든.”

“그래, 좋아…… 샘이랑 버키는 어디 있대?”

“클럽 옆에서 배구 하고 있어.”

나타샤가 말했다.

“샘이 사진 보내줬어.”

“사진.”

라커룸을 나가는 내내 스티브는 방금 들은 얘기를 이해하느라 정신이 딴 데로 날아갔다. 그러니까 샘이랑 버키가 셀카를 찍어서 나타샤한테 보냈다고?

“그, 그거 잘 됐네.”

“그래서 안심이 된다는 거야, 아니면 질투하는 거야?”

나타샤가 물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본부 건물을 떠나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스티브 자신조차 과연 어느 쪽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웠다. 그는 몇 발자국 더 모래사장 위를 걸어가다가 불쑥 멈춰 섰다.

“둘 다?”

그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작게 자조했다.

“되게 멍청한 대답인 것 같다, 이거.”

함께 걷는 내내 나타샤는 말없이 점차 줄어드는 피서객 무리와 서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살펴보기만 했다.

“보통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네 다른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리는 건 좋은 일 아냐?”

마침내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스티브도 동의했다.

“네 말이 맞아. 나도 샘과 버키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기뻐. 정말이야. 단지, 내 말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어.”

이번에는 냇이 스티브를 빤히 쳐다볼 차례였다.

“그 버키라는 사람이랑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어?”

스티브는 자신의 가벼운 입을 저주했다. 찰나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난 뒤, 스티브는 차라리 사실대로 털어놓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다시 만난 지는 사실 얼마 안 됐어.”

“그래?”

나타샤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그 전에는? 얼마나 잘 아는 사이였는데?”

스티브는 저 멀리에서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가 시작한 배그 네트를 응시했다.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었지.”

그가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도 아니었어.”

“내가 뭘 어떻게 생각했는데?”

나타샤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았다. 이제 두 사람은 20번 망루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나랑 버키가 가볍게 만나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내가?”

그러나 나타샤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과 직격으로 마주친 스티브는 당황으로 몸을 배배 꼬았다.

결국 나타샤가 먼저 기세를 수그렸다.

“스티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괜한 생각만 늘어놓는 건 그만두고, 대신 마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지켜볼 것 같아.”

어느 새 나타샤는 물과 육지를 가르는 건널판 위에 올라서서 파도를 타고 있는 서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은 스티브가 머뭇거렸다.

“어서 찾으러 가기나 해.”

냇이 그런 그의 어깨를 떠밀면서 지시했다.

“오늘 하루라도 휴가를 즐기라고, 로저스.”

“분부대로 하죠.”

스티브는 그런 그녀를 미소로 배웅하며 길을 떠났다.



나타샤를 보내고 나서 스티브는 한참을 더 해변 길을 따라 내려갔다. 배구장이 가까워질수록 긴장도 점점 커져만 갔다. 버키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활기차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버키와 샘은 서로 나란히 서서 경기를 펼치면서 완다 남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스콧은 캐시를 데리고 파라솔 아래 앉아서 양 팀한테 열심히 훈수를 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스티브는 버키가 머리를 뒤로 깔끔히 넘겨서 묶었고 분홍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며 배구를 하는 내내 샘의 반바지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파라솔 아래 앉아있던 캐시와 스콧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어?”

“한 몇 시간쯤? 캐시가 모래성 증축 공사까지 할 시간은 됐죠, 아마.”

스콧이 말했다.

“이야, 그 성 굉장히 멋진데.”

스티브가 감탄하자 캐시가 기뻐서 두 어깨를 으쓱였다.

“스티브, 왔어?”

그를 발견한 샘이 저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스티브는 대수롭지 않은 척, 가능한 한 차분하게 그물 쪽으로 걸어갔다.

“너도 할래?”

샘이 물었다.

스티브를 발견하자마자 버키는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그는 신이 나서 스티브를 향해 껑충껑충 달려갔다.

“버키.”

수줍게 ‘안녕’이라고 인사라도 건네려고 입을 열었지만,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를 발견한 버키의 반응을 미리 예상한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갑자기 몸을 던져서 목에 두 팔을 두르고 입술에 키스를 퍼붓는 걸 상상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스티브는 모래 위로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도 했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서 품속으로 뛰어든 버키를 단단히 안아들었다. 스티브한테 매달려서 다시 땅에 내려지는 내내 버키의 환한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스티브!”

버키가 기뻐서 소리쳤다. 땅에 발이 닿았는데도 스티브를 꽉 껴안고 있는 팔 힘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안녕, 버키.”

스티브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다. 그는 버키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몇 가닥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다시 이마 위로 올려주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시선을 맞추며 지긋이 응시해오자 그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요, 로저스.”

그런 둘 사이를 샘이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 너 때문에 우리 팀 MVP가 집중을 못 하고 있잖아.”

“아, 미안해.”

스티브가 버키한테서 몸을 떼어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버키가 조개처럼 딱 달라붙어서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서 계속 해도 돼, 버키.”

“난 좀 쉬어야겠어요!”

그때, 완다가 그렇게 말하더니 스콧과 캐시가 누워 있던 비치 타올 쪽으로 걸어갔다. 그 말에 피에트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을 크게 내저으며 반박했다.

“우리 아까 쉰지 삼십 분밖에 안 됐거든!”

“또 쉬고 싶어.”

파라솔 아래에 털썩 주저앉은 완다가 선탠로션을 꺼냈다.

“아빠, 나 지금 내 공 갖고 놀아도 돼?”

캐시는 소리를 지르며 공기를 빵빵하게 채운 물방울무늬 공을 휘둘렀다.

“그래, 어쩐지 오래 참았다 싶었다, 우리 땅콩.”

스콧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서 노 가져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캐시~”

마지막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샘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게임 끝이네!”

“물에 들어가서 더 할 수 있거든요!”

그러더니 피에트로는 모래사장을 마구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끝에 채인 모래 알갱이들이 여기저기 튀겼다. 캐시는 꺄악 소리를 지르면서 작은 다리로 그 뒤를 좇아가기 시작했고 스콧만이 뒤에서 슬렁슬렁 두 사람을 따라갔다.

“난 일단 쉬련다.”

샘이 완다를 따라 파라솔 아래로 들어서며 말했다. 손은 어느 새 벌써 생수병 하나를 따고 있었다.



“스티브?”

“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스티브가 고개를 돌려 버키를 쳐다봤다. 버키는 여전히 스티브한테 딱 달라붙어있었지만, 시선은 바다속에서 물을 튀기며 놀고 있는 피에트로와 스콧과 캐시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버키? 너도 들어가서 같이 놀고 싶어?”

그런 버키의 주의를 끌며 스티브가 부드럽게 물었다. 버키는 그런 스티브를 한 번 봤다가,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속에서는 팔에 튜브 토시를 낀 캐시가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고 그 뒤로 스콧이 대신 공을 들고서 힘겹게 파도를 헤치며 뒤따라가고 있었다. 피에트로는 두 부녀한테 열심히 물을 튀겼고 그때마다 캐시가 까르륵 웃었다. 버키는 다시 한 번 스티브 쪽을 돌아봤다. 큰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원하면 가서 같이 놀아도 괜찮아.”

스티브가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버키가 다른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딱 달라붙었던 몸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스티브는 버키가 세 사람한테로 돌아갈 것이라고, 스티브 대신 그들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했다. 분명 버키는 물놀이에 훨씬 더 끌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주저하더니 한 번 더 스티브 쪽을 흘끗 바라보고서는 막상 기회가 주어지자 슬쩍 멀리 떨어져서 해변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버키?”

그런 그를 뒤따라가며 스티브가 걱정스레 이름을 불렀다.

“나중에 내 선글라스 돌려줘야 돼요!”

뒤에서 완다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티브는 순식간에 버키를 따라잡은 다음, 그와 보조를 맞춰 걸었다.

“저기,”

그는 작게 버키를 불렀다. 버키가 그런 그를 흘끗 올려다보더니 작게 웃고서는, 다시 고개를 내려 모래사장 위를 걷고 있는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스티브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모래사장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버키가 앞서고 스티브가 한 발자국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는 모양새였다. 해안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파도 소리만이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버키가 어딘가 축 처진 듯 보여서 결국 스티브가 없는 용기까지 짜내서 먼저 말을 붙였다.

“오늘 하루는 재밌었어?”

“응.”

버키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고?”

“응.”

“그, 그거 참 다행이네. 응, 정말 다행이다.”

스티브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제 차이는 걸까? 버키는 더 이상 내 옆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 걸까?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의 꼬리를 물려는데, 버키가 훌쩍 그를 돌아다 봤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스티브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두 손이 공기 하나 샐 틈 없이 감겨들었다. 버키는 스티브와 눈을 맞추며 다시 작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스티브는 긴장이 풀리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와줘서 정말로 기뻐.”

부지불식간에 속마음이 튀어나가 버렸다. 버키는 미소로 되돌아봤지만, 그것 말고는 스티브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다만 마주잡은 손을 꼭 쥐어왔기 때문에 아마 진심은 어느 정도 전해졌으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때서야 스티브는 마주 웃으면서 멈췄던 말을 다시 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아직 안 말해준 거 알아?”

당장 물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수많은 질문 중에서도 하필 그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버키가 그런 그를 향해 두 눈을 깜빡였다. 단정히 땋아 내렸던 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다시 이마 위로 흘러내리면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어디서 왔어?”

스티브는 용기를 내서 좀 더 집요하게 물어봤다.

“집이 어디야?”

버키도 집이라는 단어는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바다를 향해 열심히 고갯짓을 했다.

“집이 어디야?”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랬더니 버키가 스티브를 잡고 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음, 하와이?”

스티브는 버키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마 배 위나 작은 섬에서 산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도 설명이 됐다.

“여기에는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버키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그의 손을 스티브가 더 강하게 쥐어오면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강조했다.

“여기서 나랑 같이 지내면 돼.”

그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만큼 오래 있어도 괜찮아. 버키? 나랑 같이 있고 싶어? 응?”

버키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한참동안 스티브의 얼굴을 살피더니, 스티브를 잡아끌어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면서 물었다.

“집?”

스티브가 그런 그를 마주 안으며 목에 키스했다.

“그래, 버키. 집이야.”






챕터1 끝. 


앞으로 번역하겠다고 설치지 말고 조용히 내 연성이나 하라는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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