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주소와 번역 허락문은 같은 카테고리의 Lavender 포스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역 및 윤문 주의, 존잘님이 다음 편을 안 올려줘서 발생한 연중 주의.


밤에 잠이 안 오는 심심함으로 시작해서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끝마친 번역. 한 번 시작한 시리즈는 그래도 끝내야 할 것 같아서.... 

번역에 관한 피드백 및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스티브가 밖에 나가서 노점에서 한 끼를 때우자고 말했기 때문에 버키는 그를 따라 스타크 타워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이미 아침에 토스트 조각을 먹은 터였던 터라 대체 그 많은 음식이 어디로 다 들어갈지는 모를 일이었다. 정말이지 내일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허기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스티브는 항상 그녀보다 자주 음식을 먹는 것 같았고, 최근 들어서 그녀에게도 먹어보라며 권하기 시작한 식사 중 일부는 지나치게 기름지고 호화스러웠다. 대체 왜 음식 위에 파슬리 가루를 뿌리는 것이며 거기에 무슨 특별한 기능이 있단 말인가? 하이드라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간결하고 단조로웠다. 그들이 주었던 음식은 간단한 전투식량뿐이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떠서 뉴욕의 거리를 따뜻하게 데웠기 때문에 굳이 재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캡틴 아메리카가 민간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며 버키 또한 사람들이 그녀의 팔에 달린 금속 부속물을 볼 때마다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버키는 여전히 타워 바깥에서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고 눈치를 살피는, 이제는 거의 본능이 되어버린 습관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두 눈이 재빠르게 주변을 훑으면서 얼굴들, 자동차, 그리고 카메라의 위치들을 확인했다. 스티브가 이 지역을 스캔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절차가 이미 무의식 속에 각인돼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스티브의 오른편 약간 뒤에서 따라가려고 했는데 스티브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뻗어 그녀의 왼쪽 의수를 잡아왔다. 몇몇 핸들러들은 분명 소위 말하는 ‘애정 표현’을 즐기기도 했고 그중 일부는 접촉을 피하려는 그녀를 억지로 잡아끌어 스킨쉽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스티브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손만은 길을 따라 가판대까지 걷는 내내 서로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핫도그를 팔고 있었다. 스티브는 버키에게 어떤 게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더니 곧 주문을 넣었다. 스티브는 한 개는 너무 양이 적다면서 끈질기게 회유하려 들었지만, 싫증이 난 버키는 코만 찌푸릴 뿐이었다. 대체 매번 이렇게 먹여대기만 하다가 기동성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는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스티브는 자신과 버키 몫 한 개씩을 사서 그녀를 데리고 공원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버키는 스티브가 냅킨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가판대에 갔다 오는 동안 그가 반쯤 억지로 넘겨준 자기 몫의 핫도그를 들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빵 옆의 빈 공간을 보니 양념을 담은 비닐 포장지가 몇 종류 있어서 케첩과 머스터드소스를 꺼냈다. 금속 팔은 아직 섬세한 힘 조절에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장을 찢을 때는 매우 조심해야 했다. 곧 소스 봉투가 열리더니 내용물을 쏟아낸 다음, 옆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는 스티브의 핫도그 옆에도 같은 종류의 소스 비닐들이 포장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스티브의 몫 위에는 케첩을 뿌린 다음, 빈 포장지는 마찬가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일단 한 입만 먹어보고 나머지는 스티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때 먹을 작정이었다. 대체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어떻게 먹는 걸까? 버키는 손에 들린 빵을 한 입 베어 물면서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니 같은 핫도그 가게 앞에 점심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그녀와 스티브 말고도 또 다른 커플들도 있었다.


낯선 주변 광경에 정신이 팔려서 그녀는 조용히 다가온 스티브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버키?”

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응?”

버키는 얼른 핫도그를 받고 싶어서 부모를 채근하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구경하며 대답했다.

“내 거에 케첩 뿌려준 거야?”

스티브가 물었다.

아버지한테서 렐리쉬를 듬뿍 얹은 핫도그를 건네받자 소녀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러나 소녀는 음식을 받자마자 그만 드레스 앞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Ja(응).”

버키가 말했다.

“왜 네 것처럼 머스터드소스를 뿌리지 않고?”

그가 물었다.

이제 소녀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 감정인지, 또 얼마나 순진한 감정인지.

“너 머스터드 안 좋아하잖아.”

버키가 한 입 더 베어 물면서 대답했다. 시선은 종이 냅킨 한 줌으로 어떻게든 딸의 치맛자락에 엎어진 렐리쉬를 닦아내려고 애쓰는 아버지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스티브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물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다급함에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노점 주인은 어느 새 소녀가 흘려버린 렐리쉬를 새 것으로 교체해주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다시 환한 웃음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사이 종이 냅킨을 한 움큼 챙겼다. 똑같은 사고가 일어날 때를 대비한 것이겠지. 소녀가 새로 받아든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고 버키도 소녀를 흉내 냈다. 한 입을 꿀꺽 삼킨 아이가 아버지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넌 매지네 가게에서 핫도그 시킬 때마다 항상 머스터드는 빼달라고 했었어.”

마침내 버키가 스티브의 질문에 대답했다.

“매지네 가게?”

스티브가 재빨리 되물었다. 노점 앞에 꽂혀 떨어질 줄 모르던 그녀의 시선이 드디어 휙 돌아왔다.

“뭐라고?”

스티브는 절박한 심정으로 한 번 더 물었다.

“매지네 가게가 기억나?”

“매지가 누군데?”





스티브는 매우 무거운 표정으로 버키를 데리고 타워로 돌아왔다. 점심식사 후에는 의사와의 면담이 있었다. 버키는 그들이 강제로 만나게 하는 그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사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가 내뱉은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자꾸 물어보고, 망각하도록 설계된 기억들을 자꾸만 상기시키려고 압박했다. 의사와의 면담은 ‘그 의자’에 앉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그녀의 오래된 고통을 억지로 들추어내면서, 한편으로는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받아 적고는 했다. 의사는 그녀가 겪은 고통들을 정리하려고 들었으며 그대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상담치료” 시간이 돌아올 때면 그녀는 차라리 럼로우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최소한 럼로우 옆에 있을 때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가 명확했으니까. 한 번은 스티브한테 그렇게 얘기했더니 한동안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질 않았다.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손가락 마디마다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에 묻은 피가 스티브 그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물어볼 만큼 버키가 어리석진 않았다. 핸들러들은 에셋이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닥터 페이지의 진료실에 도착한 버키는 늘 하던 대로 갈색 가죽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쉴드가 무너진 이후로 스타크는 남은 쉴드 대원들을 가능한 한 자신의 타워에 머무를 수 있도록 조처했고 닥터 페이지 역시 스타크 타워 안에 사무실을 차린 다음, 어벤저스 멤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극한 임무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조했다. 그렇지만 나타샤가 의사를 찾아오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버키는 자기도 그녀처럼 선택권이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어두운 표정의 닥터 페이지가 문 근처에서 스티브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티브가 목소리를 낮춰 의사에게 그날 오전의 일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멀리서 들려왔다. 닥터 페이지의 책상 위에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부인과 닥터 페이지 옆에서 웃고 있는 딸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자 오전에 핫도그 가게에서 보았던 살결이 흰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상념이 다시 고개를 쳐들려고 요동치기에, 버키는 다시 모든 기억의 문을 억지로 닫아 버렸다. 그녀는 이런 순간—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다만 망각하고 싶었다. 스티브와 의사에게 얼른 ‘그 의자’에 앉혀 달라고 끈질기게 설득이라도 해야 할듯 싶었다.


미션을 수행하지도 않고 좆을 받아먹지도 않으니, 버키는 대체 자신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들이 그녀의 브레인 워싱에 관해 떠들기만 하는 것도 참을 만큼 참았다. 제대로 된 핸들러라면 이즈음이면 그녀의 수많은 이용가치 중 한두 가지라도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솔직히 말해서 윈터 솔져는 스타크 타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분노만 쌓여 갔다.


닥터 페이지는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그날 하루에 관해 이야기해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에 있었던 일은 이미 스티브가 반쯤의 사실과 반쯤의 허구를 섞어서 전한 참이기에 굳이 그녀가 덧붙일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알고 있던 정보마저 뒤엉켜서 머리만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당장이라도 ‘리셋’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사는 스티브가 해준 똑같은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다. 이 의사는 이미 들은 얘기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게 분명했다. 누구를 치료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봐야 할 사람 같았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쓸모없는 의사임이 틀림 없었다.


대화가 계속 될수록 버키는 속에서 도사리고 있던 분노가 점점 치솟으려고 하는 걸 느꼈다. 분노를 느껴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도록 훈련된 지 한 세기 가까이 된 그녀였지만, 소파에 앉아서 의사가 집요하게 생각과 내면을 캐묻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화가 들끓었다.


“럼로우를 데려와.”


무심코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진심이 튀어나왔다. 럼로우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의 뼈를 더 많이 골절시킨 망할 사디스트였지만, 최소한 그는 직설적이었고 언제나 그녀를 ‘그 의자’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당장 ‘그 의자’에 앉아야 했다.


닥터 페이지는 그런 그녀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버키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럼로우는 왜 찾는 거지요?”

의사와의 신경전은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고, 점점 더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렇게 그녀를 고문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란 말인가? 버키는 아래로 늘어뜨린 두 주먹을 강하게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럼로우.”

신경질이 나서 내뱉는 음성이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의사가 다시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코앞에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병기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조금 불편해 보이는 눈치였다.

“제임스……”

의사가 말을 붙이려 했다.

“럼로우 데려 와. 지금 당장.”

그러나 버키는 더 흉흉하게 그르렁댈 뿐이었다.

“제임스, 그 사람은 더 이상―”

“당장!”

그녀가 소리쳤다.

“브록 럼로우를 데려오지 않으면 네놈 등골을 뽑아버리겠어.”

의사가 옆에 있던 리모컨처럼 생긴 물건의 버튼을 누르는 듯싶었지만, 끝내 그녀가 원하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버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저들은 평생 그녀를 이 지긋지긋한 생각들 속에 무한히 가둬놓을 작정인 것일까? 끊이지 않는 농간질로 그녀를 괴롭히고, ‘그 의자’를 치워버리는 걸로 위협이라도 가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러고도 자신들의 자산이 제대로 기능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이 자신을 다시 ‘그 의자’에 옥죄어 앉히고, 모든 것을 지우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녀는 닥터 페이지에게 눈곱만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강타한 첫 번째 주먹은 금속으로 강화된 왼쪽 팔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주먹을 날린 직후, 그녀는 곧 자신에게 처벌이 가해지리라고 예상했지만, 가혹한 응징 같은 건 날아오지 않았다. 하긴 의사처럼 천성적으로 심약하고 무력한 과학자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군인들이 받는 종류의 훈련 따위는 전혀 모르고 살아온 부류이다. 두 번째 주먹이 날아가면서 의사의 안경을 깨트리고 코뼈를 부러트렸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다. 눈앞의 녀석도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어봐야 했다. 금속으로 된 왼팔이 의사의 숨통을 움켜쥐고서 방을 가로질러 그를 질질 끌고 갔다. 의사의 힘없는 몸은 책이 가득 쌓인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에셋 앞에서 닥터 페이지는 손끝 하나 저항할 수 없었다. 싸움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형국이었다. 그녀의 오른발이 세 번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그의 몸에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두 번째 발길질을 날렸을 때 난 뼈가 갈라지는 소리는 꽤 만족스러웠지만, 그녀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저들이 다시 그녀를 ‘그 의자’에 데려다놓도록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했다.


닥터 페이지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에셋이 메탈암으로 그를 끌어올렸을 때는 넝마인형처럼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별모양 수트를 입은 핸들러가 의사의 구조 신호를 받고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는 벌써 그녀가 기절한 의사를 건물의 거대한 전면유리 앞으로 끌고 가려던 참이었다.


“버키!”

핸들러가 외쳤다.

그러나 버키는 멈추지 않고 유리창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다 부서진 의사를 바닥에 내던진 다음, 금속팔로 유리창을 깨부쉈다. 파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내부와 외부를 가르던 장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발이 쓰러진 닥터 페이지의 몸을 툭툭 치며 아래로 떨어트리려 하고 있었다.

“솔져!”

그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핸들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솔져, 그 창 옆에서 물러나.”

그가 차분하게 반복했다.


이자들은 이 지긋지긋한 게임을 멈출 생각이 없다. ‘그 의자’ 없이 어디까지 그녀를 제어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속내다. 밑도 끝도 없는 고문의 순환은 계속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핸들러에게 불복종하지 않을 것.’ 그것은 절대적인 황금률이다. 임무 중에 어느 명령을 따르고 어느 명령을 거부할지 결정하는 일은 결코 그녀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다. 그러나 끝내 ‘처벌받고 싶다는 욕망’이 솔져로 하여금 처음으로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을 이끌어냈다.

“싫어.”

솔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심지어 유리창 하나가 떨어져 나간 벽면으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으나, 핸들러는 그녀의 대답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버키는 그 잠깐의 틈새를 이용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닥터 페이지를 발끝으로 들어 올려 아찔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콘크리트 바닥으로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핸들러가 뒤에서 급습했고, 솔져가 입고 있던 자켓의 후드를 잡아채서 반대쪽 벽으로 그녀를 쾅 밀쳐냈다.


의사를 향해 달려가는 핸들러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버키가 다시 비틀비틀 두 발로 일어섰다. 그녀는 다시 핸들러에게 덤벼들어봤지만, 보통 인간보다 훨씬 빠른 반응속도 때문에 실패했다. 오히려 그는 자기를 덮치려던 버키를 막아낸 반동을 이용해서 다시 벽 쪽으로 그녀를 던져버렸다. 그녀는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며 인정사정없이 레프트 훅을 날렸다. 팔을 번갈아가며 주먹을 날려도 봤지만, 핸들러는 미동도 않고 모든 공격을 단단히 막아냈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무기가 없다는 판단이 설 무렵, 마침 의사의 책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편지 자르는 나이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에셋은 핸들러의 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몇 번 더 무차별적으로 펀치를 날리다가, 기회를 엿봐서 재빨리 그 나이프를 낚아챘다.


핸들러가 힘겨운 호흡을 내뱉었다. 그녀의 호흡에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그녀가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핸들러는 자신을 찌른 칼날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버키는 지금 시점에선 의사를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건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핸들러는 의사의 늘어진 몸뚱이를 지나칠 만큼 열심히 감싸고돌았다. 그렇다면 일단 다른 작전으로 방향을 트는 게 최선이었다. 그녀는 직접 의사를 내팽개치는 대신, 새로운 핸들러에게 가능한 한 많은 치명타를 입히는 쪽으로 계획을 선회했다.


난투가 멎고 정적이 흐르고 버키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핸들러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시도해왔다.

“버키, 그 칼 내려 놔. 우리 이럴 필요는 없―”


그러나 버키는 문장이 끝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스티브를 향해 몸을 날렸다. 오른손 안에 나이프를 꽉 쥐고 그의 갈비뼈 부근을 향해 돌진했다. 스티브는 반사적으로 칼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왼쪽에서 날아오는 주먹까지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버키는 스티브가 방심한 틈을 타서 메탈암으로 그의 얼굴을 강타했지만, 핸들러의 뼈와 근육은 의사만큼 물렁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핸들러는 아프다기보다는 놀랐다는 표정을 하고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심상치 않은 소란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닥터 페이지의 진료실로 달려온 나타샤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자마자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스티브!”

나타샤가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달려왔다.


그리고 에셋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스티브에게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다시 거세게 돌진했다. 두 사람 사이에 주먹과, 발차기과와, 거센 몸싸움이 오갔지만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날리지는 못하는 싸움이 계속됐다. 버키는 현란하게 발을 놀려서 겨우 나이프의 날로 핸들러의 얼굴을 세차게 그어내는 데 성공했다. 공격당한 그의 왼쪽 눈가로 선명한 핏물이 흘러 내렸으나, 그는 여전히 분노했다는 티 하나 내지 않았다. 대신 끈질기게 버키를 무장해제 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마침내 살로 된 그녀의 오른쪽 손을 세게 붙잡아서 잡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단단히 잡아챈 그녀의 팔을 다소 아프게 뒤로 꺾어 내고서 무릎을 꿇려 제압했다. 이제 핸들러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릴 완벽한 기회를 가졌다. 이런 자세에서 그녀는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핸들러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고, 버키는 바닥에 떨어트렸던 나이프를 다시 메탈암으로 잡아채서 그의 복부를 가늘게 일자로 베어냈다. 이번에도 핸들러는 그런 그녀를 무장해제 시켰고, 두 번 다시 나이프를 붙잡지 못하게 칼은 한 발로 멀리 차서 보내버렸다.


두 사람 모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티브가 뒤에서 버키의 양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동안, 그녀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헐떡였다. 아침에 스티브가 땋아줬던 머리는 보기 싫게 흐트러졌고 그중 몇 가닥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그만 끝내.”

그녀가 짓씹듯 뱉어냈다.

“부숴버려.”

핸들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 눈동자가 아직도 피부에서 새빨갛게 새어나오는 피와 대비되어 더 푸르게 보였다.

“부숴버리라니까!”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싫어!”

동시에 핸들러가 그녀만큼이나 큰 목청으로 소리쳤다.


“나는 럼로우가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 할 필요도 없어. 제발, 벅.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난 절대 안 멈춰.”

그녀가 눈을 번뜩이며 스티브와의 싸움 도중에 떨어트린 물건들 중 무기로 쓸 만큼 날카로운 게 없나 재빠르게 스캔하며 대답했다.

“네 녀석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아. 그러니까 날 부수려면 지금 부숴.”


버키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름끼치는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녀의 비명이 온 방을 울렸다. 숨죽이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던 나타샤가 두 허벅지로 에셋의 팔꿈치를 단단히 잡아 꿰차고서는 뼈를 비틀어 탈골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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