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링크: http://archiveofourown.org/works/1999404

원 저자: bofurrific


번역 허락 요청을 보냈는데, 원 저자님께서 1년이 넘께 잠수 중이시라 계속 답장이 오고 있지 않습니다....ㅠㅠ

그렇지만 제가 버키른만큼이나 럼로우른도 너무너무 좋아하고 짧은 글 안에 임팩트가 큰, 잘 쓴 글이어서 부득이 번역물을 먼저 올립니다. 후에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자진삭제하겠습니다. 


주의: 캐릭터 사망 주의, 불쌍한 럼로우 주의 





요약: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도중의 이야기. 럼로우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번이야말로 하이드라를 떠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버키를 데리고 도망치거나 아니면 스티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미처 모든 것을 되돌리기 전에 트리스켈리온이 무너졌고 그는 아이를 잃었다.




오메가들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일찍 알아차린다. 몸 안 깊은 곳에서 새로운 심장 박동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바로 알 수 있다.


병상에서 깨어났을 때 브록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도 그 사실이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피부와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에서 올라오는 고통이 쉴 새 없이 전신을 요동치는 와중에도 브록은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다. 늘 안에서 들려오던 또 하나의 심장 소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대로 텅 빈 배를 끌어안고서 웅크린 채로 목에서 피가 비칠 때까지 악이라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 가까스로 손을 뻗어 모르핀 용액이 담긴 수액의 투여 단추를 내리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구역질 날 만큼 역한 화약약품 냄새를 풍기는 진정제가 핏줄을 가득 채울 때까지 브록은 단추를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약 기운이 가져온 몽롱함 덕에 겨우 달디 단 망각 속으로 숨어들어가려던 그때, 부옇게 뒤섞인 붉고, 하얗고, 푸른 색채 덩어리가 흐릿한 시야 사이로 들어왔다. 깊은 수심과 배신감에 젖은 눈빛을 띄고서 엄격하게 팔짱을 낀 채 문턱에 서 있는 남자는 그의 짝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떠오른 마지막 생각은 ‘젠장, 스티브’였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브록이 두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때도 스티브는 다시 병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실망을 담은 채로 굳어버린 표정이 지난번과 다르지 않았다. 변명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은 브록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짝, 그의 스티브의 믿음을 저버렸고 하이드라의 대의명분 하에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 장본인이었다. 뱃속에서 울려오는 또 다른 박동을 느낀 순간─스티브에게 마킹을 허락했던 그때 그 순간부터 사실은 도망치고 싶었노라고,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다고, 그의 알파와 새끼를 데리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피어스와 윈터 솔져와 미션 따위는 모두 망각 속에 묻어버린 채 떠나고 싶었다는 변명 따위는 이제 와서는 아무 상관없는 공허한 청원일 뿐이리라.


눈앞의 사람에게 손을 뻗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자신의 알파에게 매달려서 응당 다른 오메가들이 그러하듯이 짝의 위안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순간적으로 솟구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와 스티브 사이에 존재하던 본딩에 다가가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건하게 결속되어 있던 끈이 차갑고 시린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본딩은 두 사람 중 한 쪽이 죽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끊어질 수 없기에, 여전히 어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가 쥐고 있던 한쪽 끝의 연결고리를 냉랭하게 닫아버렸고, 브록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이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그렇게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두 손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당연히 이어지리라 예상했던 고문은 끝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전신이 버석버석하게 타버리고 병상 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 하게 된 몸뚱어리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간혹 병실로 찾아와 그를 심문하고, 모르핀 투여량을 낮춰서 행여 그가 달디 단 꿈의 망각 속으로 도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쉴드의 요원들이 쳐들어와서 자신을 병상에서 끌고 나가 광견병 걸린 개 쏴죽이듯이 사살하리라 생각했던 브록에게는 뜻밖의 결과였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건대, 이 상태로 내버려두느니 차라리 그렇게 죽여주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 후로 스티브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를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가끔씩은 지금은 사라진 아기가 그의 진료 차트 속에 한 줄로나마 남아 있기는 했을는지, 무용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의사들이 숯덩이가 되어버린 그의 살점을 한 조각씩 떼어내고 산산조각 난 뼈를 다시 짜 맞추는 과정에서 그의 자궁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긴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스티브도 알게 되었을까? 차마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만약 스티브가 알게 된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를 배신한 짝의 새끼 따위, 미처 손가락이 생기기도 전에 제거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 그래도 좁은 병실이 점점 줄어드는 환각이 일면서 숨이 가빠왔다. 짧고 날카로운 헐떡임이 이어지고 양 손은 링겔에서 흘러나오는 마취제로도 수그러들지 않는 고통 때문에 땀범벅이 된 시트를 찢어져라 부여잡았다.


시간이 흘러 상해버린 피부는 조금씩 치료가 되어도 공허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살면서 별로 새끼를 품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막상 그 새끼를 잃어버리고 나니 그것 없이 어떻게 혼자서 숨을 쉬고 살아가야하는지조차 모를 만큼 낯선 막막함이 찾아왔다. 뱃속에 고이 자리 잡았던 작은 박동 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로부터 브록의 세상은 귀가 먹을 만치 적막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브록에게는 당장이라도 고통이 필요했고, 취조실의 책상에 수갑으로 묶여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다섯 손가락이 모두 부서지고 얼굴은 퉁퉁 부어오르는 그런 고통이 간절했다. 이 지독한 공허함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은 결코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고통의 부재가 고통보다 더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깨달았다. 쉴드의 마지막 남은 유산인 브록을 그들은 항상 예의주시했지만, 제한된 시야 안에서 자유롭게 나다니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덕분에 길을 걸을 때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 어린 욕설과 비난을 들을 수 있었다. 배신자. 살인마. 본딩까지 끊어낸 놈. 마치 자신들은 뭐라도 더 나은 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들 손은 한 뼘이라도 더 깨끗한 것 마냥 그러는 꼴이 우스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로 걸어 다니기 시작한 브록을 스티브는 철저하게 피해 다녔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즉시 등을 돌렸고 어쩌다가 들어간 방에 그가 있는 것을 보면 즉시 떠났다. 한 번은 우연히 윈터 솔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잘 어울려 보였다. 누가 봐도 ‘옳은’ 한 쌍이었다. 후에 누군가 비웃으면서 로저스가 브록과의 남아 있는 본딩을 완전히 끊어낼 방법을 수소문 하고 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그 말 한 마디가 그토록 아플 필요는 없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없는 자궁 속을 누가 계속 쿵쿵 치기라도 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져선 안 될 일이었다. 더 이상 스티브가 그의 사람인 것도 아닌 데다, 브록에게는 더 이상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그는 피스톨 한 정을 훔쳐서 빈 방에 들어가 자물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어이가 없을 만치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왜 진작 행동에 옮기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손 안에 쥔 M9 권총이 무겁고 단단했다. 눈을 감고서 크게 벌린 입 안으로 총구를 욱여넣자 혀끝에 닿는 금속이 차가웠다. 그는 남은 한 손을 들어 배를 덮었다.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너무나 잘못되어있고, 공허한 배. 그리고 스티브에게, 아기에게, 자기 자신에게 사과의 말을 웅얼거렸다. 그래도 괜찮을지는 잘 몰랐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총구는 여전히 입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무게감이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그 순간 브록의 내면에서는 이 망할 짓거리, 끝낼 거면 어서 끝내버리라고 스스로 비난하는 욕지거리가 횡행하고 있었다. 고통이 두려운 것도 아니고 죽음이 두려운 것도 아닌데 도통 손가락이 움직이려고 하지를 않았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자기혐오가 들끓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브록은 얼어붙은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들이닥친 이는 참 얄궂게도 스티브였다. 이 지경까지 오고 나서야 마주치게 된 얼굴이 하필 저 얼굴이라니, 운도 참 지랄맞게 없었다. 브록은 입에 물고 있던 권총이 우악스레 압수되고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라고 닦달당할 순간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나 스티브는 꼼짝 않고 서 있을 뿐, 방 안을 채운 소리는 “겁쟁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였다. 명백한 사실이기에 브록은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입에서 빼낸 권총이 무릎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브록은 뒤에 있던 창문에 머리를 툭 떨구며 힘없이 기대섰다. 스티브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미처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브록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갔다.


“나, 임신했었습니다.”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구속이 되어 귀신처럼 방 안을 떠돌아다녔다. 하나의 문장이 드디어 현실이 되고 지나간 과거가 되어 그를 아프게 했다. 살면서 받아온 어떤 훈련도 이토록 비참한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강처럼 흘러 내렸다. 호흡을 가다듬으려다 목이 막히는 바람에 기침이 났다. 브록은 한 팔로 배를 감싸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는 원치 않게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막아보려고 속이 메스꺼워질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 그 망할 알파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눈이 부어서 흐릿해진 시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스티브는 사라지고 없었다. 브록은 자신의 상처 난 얼굴을 할퀴고 짓이기며 절규했다.


복도를 거닐 때마다 들려오던 야유가 기적처럼 멈췄다. 어느 누구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과 무언의 동정이 더 비참했다. 브록은 그대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스티브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 편이 차라리 나았다.


공원으로 간 브록은 놀이터에 걸린 그네 위에 아이를 태우고 뒤에서 밀어주는 장면과, 아이와 함께하는 피크닉과, 입맞춤과, 앵두처럼 작은 입술이 까르륵 뒤집어지며 “아빠”하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데 성공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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