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뉴욕 여행이 결정되자마자, 이번 여정 중에는 반드시 스티브와 버키의 데이트 장소(!)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다 그렇듯, 일정이 중반에 가까워지자 부족한 체력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전날 처음 타본 브룩클린행 J노선의 분위기가 어쩐지 어두운 것 같아서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브룩클린이 지척인데,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랴.' 싶은 생각으로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 스모그 없는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빛 아래 브룩클린이 있었다.   

 

사실, '행록' 같은 거창한 제목을 붙이기엔 민망한 짧은 방문이다. 그래도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브룩클린 브릿지, 덤보, 파크 슬로프, 코니 아일랜드를 열심히, 그러나 여유롭게 둘러보고 왔다. 날 좋은 일요일에 다녀온 브룩클린 기록. 












1. DUMBO & 교각들



DUMBO에서 바라본 맨해튼 브릿지. 
DUMBO에서 바라본 맨해튼 브릿지. 

브룩클린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상상하던 도시의 이미지가 딱 위 사진과 같았다. 약간 그늘지고, 오래된 갈색 벽돌 건물이 촘촘히 차 있고, 그 사이로 옛 냄새 물씬 나는 철교가 슬그머니 보이는 풍경.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그려진, 소외된 인간들의 도시. 물론 '가난한 브룩클린'은 옛날 옛적 이야기다. 일단의 젊은 예술인들이 이 지역을 아지트로 삼으면서 이미 브룩클린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지가 오래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시초 격이라고 할까. 뉴욕 시청에서 브루클린 건너서 도착한 북부 브룩클린에는 번듯한 아파트 단지가 늘어서 있고, 대로(broadway)와 거리(street)가 교차하는 곳마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작은 삼각형 지구에는 어김없이 공원이 들어서 있다. 언뜻 느낀 북브룩클린의 첫인상은 맨해튼보다 주거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생각이었다. 맨해튼보다 조용하고(어디나 상대적으로) 교통체증도 심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방이 마천루로 둘러쌓인 풍경이 적었다. 맨해튼의 하늘을 덮는 빌딩숲은 멀리서 볼 때는 멋있었지만 직접 그 안에 서면 숨이 막혀왔었다. 


그런 의미에서 탁 봐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붉은색 벽돌의 공장 건물, 그 건물 틈새로 보이는 맨해튼 브릿지의 비 오는 날 풍경은 위압감 없이 운치 있어 보였다. 목재형 현수교인 브루클린 다리에 비해서 유명새는 떨어지지만, 오히려 DUMBO 지역에서 봤을 때 더 빛나는 다리는 맨해튼 브릿지였다. 수수한 장식의 회색 철골 구조가 붉은 벽돌 사이로 솟으니까 꽤 멋져 보였다. 



맨해튼 다리 전경. 브루클린 다리와 비교하면 수수함이 두드러진다.
맨해튼 다리 전경. 브루클린 다리와 비교하면 수수함이 두드러진다.


브루클린 측 지상에서 올려다 본 브루클린 다리.
브루클린 측 지상에서 올려다 본 브루클린 다리.


목재형 철제 현수교(모양만 목재다!) 브루클린 다리. 찍기 어려웠다. 
목재형 철제 현수교(모양만 목재다!) 브루클린 다리. 찍기 어려웠다. 



이번 뉴욕-브루클린 여행을 가면서 마음에 1순위로 넣고 갔던 곳이 바로 브루클린 다리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뉴욕에 가면 맨해튼에서건 브루클린에서건 이 다리를 배경으로 찍는 사진이 그렇게나 유명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예전에 이 다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스팁버키 팬아트를 본 것이 기억에 감명 깊게(!) 남아서였다. 덕분에 뉴욕에 도착한 첫 날부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쾌거를 이뤘으며(사실 별로 안 길다), 이후 다리를 구경하기에 최고의 스팟이라는 DUMBO를 찾기 위해 두 번을 더 찾아 헤맸다. 여행 마지막 날 드디어 덤보 아래서 다리를 보는 것에 성공했으니, 이로써 브루클린 다리에 총 세 번이나 찾아간 셈이다. 


직접 걸어본 브루클린 다리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멋있었다. 좁은 교각 위는 관광객이 점령한 보행로와 통근하는 자전거 이용자가 뒤섞여서 정신 없고 복작거렸지만, 그 분잡함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관광지에 가면 관광객 분위기를 한껏 내주는 것이 좋다. 비록 몸은 혼자 갔어도 마음만은 정말 열심히, 친구와 여행온 것처럼 신나게 걸어다녔다.  




다리와 연인.
다리와 연인.
브루클린의 현.
브루클린의 현.


사진에 찍힌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다리는 직접 걸어볼 때 즐거움이 더 커진다. 19세기 말에 시공해서 장장 20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고, 1910년대에 이르러서야 완공된 목재형 현수교는 분명 낡고 평범한 다리 모양인데도 어딘가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목재 보드블록을 사용한 탓에 목조 건축인가 착각하기 쉽지만, 어디까지나 목재 건조를 '흉내낸' 철제 교각이다. 실제로 매듭을 정교하게 흉내낸 케이블의 밧줄도 모두 쇠로 만들어져 있다. 가장 현대적인 재료(철)로 과거의 향취(나무)를 모방하려는 태도가 참으로 미국적이었다. 그런데 그 눈속임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화면 분할이 꽤 멋있는 것 아닌가. 




당연히 쇠밧줄이다.
당연히 쇠밧줄이다.
현수 케이블.
현수 케이블.


뉴욕에서 건립된 최초의 현수교였던 만큼, 다리는 건설 과정에서 (건축가 본인을 포함해서) 꽤 많은 노동자를 수장시킨 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실제로 빨리 걸으면 10여 분만에 건널 수 있는 짧은 다리지만, 처음 건설되었을 때만 해도 브루클린과 맨해튼 남부 시내를 잇는 최초의 다리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브루클린 주민들이 맨해튼으로 출근할 때 이 다리를 건너 다녔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하철 J 노선도 없고 체계적인 버스 노선도 없던 1930~40년대에, 아마 스티브와 버키는 이 다리를 건너 다녔겠지? 라고 생각해 본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Ao3의 팬픽들을 보면 주로 버키가 졸업 후에 부두 노동자로 일용했다는 설정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두가 대체 어디일까 하는 점이다. 사람들이 종종 잊곤 하지만, 뉴욕은 엄연한 항구도시며 주요 부두만 해도 맨해튼 양측에 두 개, 브루클린에도 네이비 야드를 포함해서 두어 개가 더 있다. 이 많은 부두 중에 버키는 어디서 일했다는 것이며, 어쩌다가 팬덤에서 버키 부두 노동자설이 메이저한 설정이 되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참고로 MCU 위키에는 따로 퍼벤 시절 스티브와 버키의 직업이 따로 나와있지 않다.) 






사랑스런 도시 브루클린! 브루클린-퀸즈 연결도로 북동방향.
사랑스런 도시 브루클린! 브루클린-퀸즈 연결도로 북동방향.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미국에 도착한 걸 실감한다는데, 나는 위의 브루클린 진입 표지판을 보고서야 '왔다'는 걸 실감했다. 열네 시간의 비행을 겪고 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잘 모르겠던 그 이방감을 교통 표지판을 보고 느끼는 것은 여행 중에 종종 있는 일이다. '사랑스런 도시 브루클린' 표지판을 봤을 때도 그랬다. '내가 오긴 왔구나', 그런 생각. 



 




DUMBO의 폐극장을 개축한 어느 공연장.
DUMBO의 폐극장을 개축한 어느 공연장.
DUMBO!
DUMBO!

덤보에 가면 브루클린 다리와 100년 넘은 회전목마가 명물이라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이 주홍색 벽돌담이 훨씬 더 '덤보'스러웠다. 어쩌면 세 번의 덤보 방문 중에 길을 찾느라 수 없이 이 옆을 지나다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붉은기 흠씬 도는 얇은 벽돌, 천장 없이 시원하게 뚫린 낡은 정원, 사람 키만한 널따란 창문. 그야말로 '힙'한 광경이었다. 흔히 브루클린-덤보를 말할 때 떠올리는 '힙'스러움의 결정체. 평소 소위 '힙'하다는 표현이나 '힙'한 것들을 굉장히 웃기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덤보의 이 극장은 정말..... 힙하다는 말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심지어 버려진 공장을 개축해서 만든 공연장이라니, 기원까지 완전 '힙'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옛 공장의 모습.
아직도 남아 있는 옛 공장의 모습.

이렇게 창문 모양으로 부조를 낸 장식까지 '힙'했다. 멀리서 유람선을 타고 가다보면 네이비 야드를 비롯한 브루클린 강변에 이런 옛날 공장 건물이 잔뜩 늘어서 있다. 그때는 커다란 창문을 열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창문을 흉내낸 단순한 장식이었다. 대체 무슨 용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맨해튼과는 다른 브루클린만의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하는 데 일조한다. 




창문 너머 작은 마당.
창문 너머 작은 마당.


이 극장이 유독 눈에 띄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브루클린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남은 오래된 붉은벽 건물을 만나게 된다. 덕질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내 눈에는 그것까지도 공업도시 브루클린의 면모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로 보였다. 인구 수로 따지면 뉴욕 주 중에서 3위, 100년 전까지만 해도 맨해튼과 엇비슷한 규모의 산업도시였던 브루클린의 강한 존재감이 지금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거리로 치면 서울과 경기도 광명시 정도일 뿐이지만, 언제 어느 때나 맨해튼과는 다른 '브루클린 주민'이 사는 동네에서는 그만의 분위기가 녹아 있었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브루클린에는 브루클린 억양이 따로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차이는 서울 방언과 수원 방언 정도.) 














2. 코니 아일랜드 




지하철 코니 아일랜드 역.
지하철 코니 아일랜드 역.

두 번째 브루클린 방문에서 핵심적으로 돌아본 곳은 단연 코니 아일랜드와 해변이었다. 스팁버키의 고향을 탐사하러 간 여행이니만큼, 코니 아일랜드를 빼놓을 수 없었으니! 최근 <홈커밍>에도 등장해서 아직 건재함을 알려준 스벜의 코니 아일랜드는 아직 봄기운이 만연한 4월 어느 주말에 방문하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오죽하면 겁이 많아서 놀이기구 타는 것에 관심이 없는 나까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들뜨는 기분이었을까. 19세기 후반에 개장한 세계 최초의 서민 오락지구, 그래서 소박하고(규모가 작고) 대중적인(시설이 허름한) 놀이공원. 백년 전의 확고한 지위는 세월 속으로 사라졌지만, 날씨 좋은 주말마다 지역 주민이나 가족들이 마실 삼아 나오는 상징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창한 일요일에 방문한 덕에 운 좋게도 간만에 사람이 북적이던 코니 아일랜드에서의 사진과 덕질을 정리해 본다. 







백년이 넘은 Nathan's.
백년이 넘은 Nathan's.


핫도그를 먹자!
핫도그를 먹자!

역사에서 나와 놀이공원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은 백년 된 핫도그 가게 Nathan's였다. 오늘날 뉴욕 길거리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핫도그를 가장 먼저 판매하기 시작한 가게로, 코니 아일랜드의 이곳이 본점이었다고 한다. 100년 전부터 핫도그로 명성을 날린 가게이니만큼, 가격은 조금 나가지만 소시지의 육즙이 환상적이었다. (사실 미국의 모든 핫도그가 다 그렇다.) 미국인들의 식사량이나 평균 스케일에 비해서 과연 요기가 될까 싶게 적은 핫도그. 아마 스티브와 버키가 코니 아일랜드에 놀러 갔다가 돌아올 차비를 털어 사서 나눠먹었다는 핫도그가 네이선 핫도그였을 거다. 70년 전과 지금의 가격이나 음식 양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그때 시점에서 봐도 푸짐한 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작은 핫도그도 반으로 나눠 먹은 두 사람의 풋풋함이 놀라운 건지, 아니면 미국인들에게 핫도그란 우리말의 간식보다도 덜한 후식 느낌이었던 건지. 어쨌든 양이 많기로 유명한 여타 미국 대중음식에 비해서 굉장히 소박한 크기였던 것만은 기억난다. 





치즈덕과 핫도그.
치즈덕과 핫도그.

왔으니 안 먹어볼 수 없다. 긴 줄을 기다려서 치즈덕과 핫도그 두 개를 주문했다. 시키면서 너무 많이 사는 걸까 걱정했는데, 왠걸. 막상 먹어보니 여전히 배가 출출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맛있었다. 빵 사이에 소시지를 끼운 간단한 조리일 뿐인데, 육즙이 환상적이었다. 소시지 자체에 불맛과 간이 살아 있어서 따로 케첩이나 머스터드를 뿌리지 않아도 짭짤한 맛이 났다. 탄수화물+짭쪼름한 육류는 언제나 최고의 조합이다. 그 위에 녹인 치즈를 추가한 치즈덕도 치즈를 안 좋아하는 나조차 순식간에 흡입하게 될만큼 기막힌 맛이었다. 원래 핫도그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쩐지 뉴욕 길거리나 다른 가게에서 사먹은 핫도그보다 맛있는 것 같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네이선의 핫도그는 변함 없이 똑같다고 하는데, 해동된 할배들도 오랜만에 이곳 네이선을 찾아 다시 맛봤으면 하는 행복한 망상을 해본다. 코니 아일랜드의 명물이 어느 새 쑥쑥 자라서 전국적인 체인점이 됐다는 걸 알면 할배들도 새삼 어떤 감동을 느끼지 않을까. 기본 핫도그밖에 없던 메뉴판에 치즈덕, 칠리덕, 다양한 프라이 메뉴가 추가된 것을 보고서 격세지감도 느끼고, 이번에는 차비 걱정 없이 맘껏 먹을 수 있기를. (덤으로 시간이 남는다면 독립기념일=스티브 생일마다 열리는 네이선 배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도 참가할 수 있기를. 시빌워 버키라면 어쩐지 든든하다.) 




독립기념일(7월 4일)마다 열리는 네이선 배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
독립기념일(7월 4일)마다 열리는 네이선 배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








루나 파크의 사격장들. 버키에게 딱 맞는 장소.
루나 파크의 사격장들. 버키에게 딱 맞는 장소.

네이선 핫도그를 지나서 드디어 놀이공원인 루나 파크로 들어갔다. 코니 아일랜드는 크게 놀이공원인 루나 파크와 모래사장인 보드워크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루나 파크는 규모가 큰 월미도 느낌이다. 외양은 촌스러워 보이지만 의외로 붐볐다. 아이들을 비롯한 가족 손님이 많은 것은 당연하고, 의외로 젊은 커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마 최초의 놀이공원이라는 유명세를 따라 명물 구경을 오거나 그 옆의 모래사장을 보러 온 것 같았다. 유치한 매력이 있는 코니 아일랜드의 인파를 따라 손을 꼭 잡고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젊은 커플의 모습이 기억난다. 


기구 탑승은 유료지만 입장과 해변 구경은 무료다. 덕분에 산책이나 일광욕이 목적인 나 같은 혼자 여행객도 별 부담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다만, 이때 산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조용한 산책이 아닌,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돌아다니는 미국식 산책이긴 하지만.(사실 불법 행위다). 쓰고 보니 나들이보단 산책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100년 된 목조 롤러코스터, 사이클론.
100년 된 목조 롤러코스터, 사이클론.

그리고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목재 롤러코스터 사이클론! 퍼벤져에서 버키가 스티브를 억지로 태운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 홈커밍의 장렬한 액션 씬에서도 포화를 피해 간 놀라운 영기의 롤러코스터다. 지지대는 물론이고 레일, 탑승석까지 모두 나무로 만든 이 굉장한 롤러코스터를 보고 있으려니까 자연스럽게 머리 속으로 해동된 할배들의 데이트 한 편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예를 들어서... 




사이클론 전경.
사이클론 전경.

이렇게 백년이 흐르고도 번듯하게 살아 있는 사이클론을 보고 놀란 버키 할배가 감탄하면, 해동 후 첫 데이트로 코니 아일랜드를 선택한 스티브 할배의 가슴도 꽤 우쭐할 거다. 회고에 잠긴 것도 잠시, 열일곱 살의 즐거운 추억을 그리운 눈빛으로 회상하던 버키 할배가 이번에도 거침 없이 모험을 제안할 거다. 이젠 신체 건강해진 스티브 할배를 사이클론 태우기. 데이트 장소를 선정할 때부터 스티브 할배도 예상한 일이라, 순순히 표를 끊고 타보면, 의외로 경사도 낮고 360도 회전도 없는 저난이도의 롤러 코스터에 스티브 할배도 감회가 새로울 거다. 멸치 시절에는 한 번 탔다가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던 롤러 코스터가, 이렇게 큰 다음에 다시 타니 놀이터의 그네 같은 기분. 그런 사소한 경험 하나하나가 흑백 기억에 색을 덧입히고 슬픈 과거도 화사한 추억으로 변하게 해준다. 





스티브의 인생 첫 롤러코스터, 사이클론.
스티브의 인생 첫 롤러코스터, 사이클론.



나도 탈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탈 수 있을 것 같다.







루나 파크에 롤러 코스터가 사이클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담하고 고전적인 멋이 있지만, 그만큼 자극이 덜한 사이클론을 대신해서 나름의 스릴을 맡고 있는 신형 썬더볼트가 있다. (이름마저 운명적이다) 썬더볼트는 높이 한 번 올라갔다가 수직 강하한 후, 서너 번 정도 360도 회전을 반복하는 비교적 새 롤러 코스터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롤러코스터와 비슷하다. 나는 타볼 엄두는 당연히 내지 못했고, 멀리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근처에만 가도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데,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마법 같은 비명이었다. 




이름마저 운명적인 썬더볼트. 버키에게 딱인 이름.
이름마저 운명적인 썬더볼트. 버키에게 딱인 이름.


맑은 하늘, 높이 솟은 썬더볼트. 
맑은 하늘, 높이 솟은 썬더볼트. 

롤러 코스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별 거 아닌 구조겠지만, 나처럼 놀이기구를 잘 못 타는 사람한테는 저 수직강하와 반복되는 회전을 보고만 있어도 발끝이 시려온다. 그건 아마 스티브 할배도 마찬가지일 거라 상상해 본다. 내 동인설정 속에서 스티브는 임무 중에 아무리 날고 기고 뛰고 아크로바틱 묘기를 부릴 수 있어도, 롤러코스터처럼 순수하게 '스릴을 즐기기 위해'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즐거움은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 스티브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썬더볼트를 발견하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는 버키 할배라니,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게 21세기에도 버키 할배한테 떠밀려서 썬더볼트에 탑승, 눈물을 머금는 스팁 할배를 생각하니까 마음이 덕심으로 풍만하게 차오르더라. 덕후란 이토록 작고 사소한 것에도 이야기를 붙이고 혼자 즐거워하는 존재다. 





곡선이 예쁜 썬더볼트. 옆에서 보면 더욱 무섭다. 
곡선이 예쁜 썬더볼트. 옆에서 보면 더욱 무섭다. 





기왕 도전했는데, 하나만 타면 재미없다. 내친 김에 90도로 누워서 돌아가는 회전 기구와 배를 깔고 엎드려서 타는 롤러코스터까지 태워주는 버키 할배. 사진의 잘린 아래 부분에는 친구를 떠밀어 놓고서 기구 아래 앉아서 신나게 그 비명 소리를 구경하는 버키 할배가 있다. 옛맛 그대로에 양은 늘어난 소다 아이스크림까지 쪽쪽 빨고 있으면 금상첨화. 







1920년대에 오픈한 목조 관람차, 원더휠.
1920년대에 오픈한 목조 관람차, 원더휠.




한차례 고공 스릴을 즐겼으니, 이번에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줘야 할 차례다. 아직 멀미가 올라올 것 같은 스티브 할배를 데리고서 방황하던 버키 할배가 원더휠을 발견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남사스럽다고 못 타봤는데, 지난 인생 동안 산전수전 겪으면서 연애에서는 솔직함이 최고라는 사실을 터득한 버키 할배가 이번에는 아닌 척 뒤로 빼지 않는다. 대신 스티브 할배의 손 꼭 잡고 이날 처음으로 기구에 탑승, 스티브 할배는 방금 전까지 버키 할배의 간계에 휘말려서 비명지르던 것도 잊고서 싱글벙글 관람차에 탑승한다. 꼭대기에서 단둘이 본 브루클린 전경은 근 한 세기가 지나도 변함 없다. 





내려온 뒤에는 다시 사격장 거리를 지나다가, 버키 할배의 성화에 못 이겨 사격 게임도 할 거다. 지정사수 출신인 본인이 직접 따면 되지 않느냐는 설득도 소용없다. 원래 이런 데서 따는 인형은 꼭 다른 사람이 따줘야 마음에 차는 법이니까. 단순한 추억 회상 놀이+핫도그+해변만 생각하고 섬에 왔던 스티브 할배는 그렇게 신형 롤러코스터도 체험해 보고 버키 할배 주문에 따라서 인형도 따 보고, 의지와 상관 없이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볼 거다. 그렇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해동 직후에 혼자서 우울증에 시달리던 때보다는 행복할 테다. 






코니 아일랜드 해변. 
코니 아일랜드 해변. 
보드워크에서 바라본 루나 파크 전경.
보드워크에서 바라본 루나 파크 전경.


할배들의 데이트 코스를 마무리할 최적의 장소는 역시 보드워크 비치일 거라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다시 언급하는 사실이지만, 뉴욕은 항구 도시다. 브루클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렇게 남쪽 끝 코니 아일랜드로 가면 대양의 시작부를 볼 수 있다. 그래도 바다 옆이라도 바람이 세다. 햇빛을 따스하게 내리쬐고 해변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니, 온갖 곳이 사람과 강아지들 천지다. 부메랑을 잡으러 뛰노는 개들, 산책하는 사람들, 노래하는 사람들, 그리고 벤치 위에 느긋하게 늘어진 사람들까지.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부류가 몹시 안락해 보였기에 나도 따라해 봤다. 햇빛은 따갑지 않을 정도로 딱 적당히 밝고 바람이 솔솔 부니, 그야말로 누워 본 최고의 벤치였다. 




코니에는 이렇게 드러눕기에 딱인 벤치도 있다. 
코니에는 이렇게 드러눕기에 딱인 벤치도 있다. 















3. 파크 슬로프 & 프로스펙트 공원 


파크 슬로프 5번가의 집들. 
파크 슬로프 5번가의 집들. 

반나절에 걸친 성지(=코니 아일랜드) 구경을 마치고, 이번에는 올드스타일의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는 파크 슬로프로 향했다. 스티브와 버키가 살던 칠십 년 전에야 브루클린의 시내 중 시내였겠지만, 남북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된 오늘 나레는 비교적 맨해튼에 가까운 북부에 위치해 있다. 프로스펙트 공원 바로 옆에 있고, 브루클린 다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이곳 파크 슬로프의 진정한 매력과 역사를 느끼려면 일일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 좋다(고 트립 어드바이저에 나와 있다.) 그러나 시간은 많지만 돈은 부족했던 나홀로 여행자로서 비싼 개인 투어에 투자할 자금은 없었기에, 혼자서 5번가를 쭉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파크슬로프 5번가를 들린 데는 이곳이 브루클린 전성기의 주택 양식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예전에 번역한 어느 팬픽에서 이곳이 자주 버키의 고향집으로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1930년대에야 평범한 가정집 주택에 해당됐을 이곳 파크슬로프도 이제는 브루클린의 다른 오래된 지역과 마찬가지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지 오래다. 말인즉 집값이 비싸고 거리도 안전하고 깨끗한 분위기라는 얘기. 그런데 대체 영미 팬덤의 수많은 팬픽 작가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파크 슬로프 5번가를 버키의 고향집이 위치한 장소로 설정한 것일까? 버키가 일한 부두의 위치와 더불어 해외 스벜 팬픽의 궁금한 설정이다. 


안타깝게도 파크 슬로프를 오래 둘러보지는 못했다. 햇빛은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아침부터 코니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느라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 저무는 시간에 맞춰서 브루클린 다리를 한 번 더 봐야 했으니, 결국 부족한 체력이 여행지에서 발목을 잡고 말았다. 덕분에 파크 슬로프 동편에 이어진 널따란 프로스펙트 공원도 절반 정도만 겉훑기로 지나가야 했던 점이 아쉽다. 





프로스펙트 공원. 브루클린의 보라매 공원이다.
프로스펙트 공원. 브루클린의 보라매 공원이다.
프로스펙트 공원의 휘날리는 연. 
프로스펙트 공원의 휘날리는 연. 

원래 프로스펙트 공원에 찾아간 이유는 순전히 이곳에 세워졌다는 캡틴 아메리카 동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길을 찾아가던 도중 우연히 마주친 기사를 통해 캡틴의 동상은 이미 철거되어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접했고, 결국 사람 구경이나 하자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꿔 먹어야 했으니, 역시 인생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날씨 좋은 일요일이었던 탓에 프로스펙트 공원도 어김없이 사람이 붐볐다. 붐볐다고 적기는 했지만, 기본 규모가 큰 터라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나들이를 나와도 공간이 부족하거나 답답한 느낌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공원의 들판 하나에서만 동네 야구팀 열 개가 제각기 야구 경기를 하는 모습이나 연 날리는 모습이 딱 영등포구의 보라매 공원 같았다. 약간 더 넓고, 약간 더 초목이 많으며, 약간 더 길이 복잡한 보라매 공원. 심지어 공원 북측 문에는 스티브와 버키가 가봤다는 브루클린 식물원도 있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는 아마도 멸치 시절의 스티브가 자주 들렀으리라 생각하는 브루클린 미술관도 있다! 당연히 두 곳 다 가보고 싶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고 카메라 배터리도 나갔기에 그만 익숙한 덤보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 대신 해동된 할배들이 실컷 즐기고 있을 테니 따로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가보지 못한 것, 두고 떠나와야 했던 곳에 대한 아쉬움이 사무쳐 흐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 뿐이다. 어떻게든 '언젠가 다시 올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실현 가능성이 아무리 낮더라도 마음만큼은 그렇게 먹어야 여행지를 떠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다음 장소로, 혹은 집으로 떠날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이번 여행에서도 '다음에 또 다시 오게 되겠지'라는 자기 세뇌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부족한 기억이나마 그대로 흘려보내기 싫어서 꾸역꾸역 정리한 기록이지만, 이렇게 사진과 글을 늘어놓고 보니 다시 욕구가 충동질 친다. 어쩔 수 있나, 이번에도 같은 말로 참을 수밖에. 괜찮아. 언젠가 다시 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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