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스모그 없이 창창한 날이었다. 해는 높고 바람은 솔솔 부니, 날씨가 맑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선심 쓰듯 바람을 보내준 하늘 덕분에 고될 줄 알았던 인사동 가이드를 수월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내 여행이 아닌 만큼 가급적 카메라를 안 꺼내려고 했지만, 6시간을 인사동과 북촌을 오가다 보니까 몇 장 안 찍을 수가 없다. 북촌 방문 n번 만에 드디어 북촌8경과 한옥을 사용한 전시 공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여행이 아니라고 했지만, 뜻밖의 경치를 계속 계속 만나다니. 여행은 여행이구나. 





<미의 완성>. 연꽃 청자를 철로 재현했다. 
<미의 완성>. 연꽃 청자를 철로 재현했다. 

아직은 북촌이 아니다. 인사동 경인미술관 갤러리에서 발견한 공예 전시회. 구한말 박영효가 살았던 고택은 이제 다섯 개의 갤러리와 전통 찻집이 되어서 관광객을 맞이한다. 경인미술관은 작은 마당이 딸렸다는 점 때문에 인사동의 많은 전시 공간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점하기 쉬운 미술관이다. 그러나 건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는 좋지만, 과연 열리는 전시의 질도 전시 공간의 질을 따라갈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날 열리고 있었던 전시회 5개 중 4개는 아마추어 단체의 진부한 야생화 전시회, 소품 공예 전시회였다. 금속 공예가들의 합동 전시회만이 높은 완성도와 아우라로 발길을 잡는다.







계동에서 발견한 한옥 전시 공간.
계동에서 발견한 한옥 전시 공간.

북촌이라고 퉁쳐서 부르지만, 사실 북촌은 꽤 넓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청동을 거쳐, 우측으로 쭉쭉 가다 보면 가회동이다. 정독 도서관까지 올랐다가 방향을 꺾어 중앙고를 찾고 나면 그 다음부터 현대사옥까지는 계동에 속한다. 메인 북촌에 밀려서 방문객이 비교적 적은 이곳 계동에서 이날의 하이라이트를 만났다. 한옥을 개조 없이 그대로 간이 전시 공간으로 사용한 전시회였다. 나중에서야 북촌이나 계동에는 이런 종류의 한옥 전시 공간이 이곳저곳 포진해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날 돌아본 대여섯 개의 전시회 중에서는 단연 이 전시회가 가장 아름다웠다. 다만 작품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전시회 이름을 못 알아온 것이 아쉽다. 나오면서 부랴부랴 전시가 열렸던 '봉산재'의 현판을 찍었다. '산을 받드는 재단'이라는 거창하고 동양적인 전시관 이름과 달리, 전시 내용 자체는 서양화 작가의 아기자기한 개인전이었다. 




방 안에서 사진을 찍으시던 할머니.
방 안에서 사진을 찍으시던 할머니.


한옥에 걸린 이국적 타일.
한옥에 걸린 이국적 타일.

근동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타일 위에 그린 풍경 그림. 매끄러운 하늘색마저 무슬림의 기하학 타일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막상 이 타일이 걸린 곳은 한지 바른 벽 위였다. 묘한 조화가 이질적이지 않고 어우러진다. 소색 벽지를 보며 가본 적도 없는 소아시아를 꿈꿨다. 






문지방으로 연결되는 화실들.
문지방으로 연결되는 화실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옥 내에 마련된 작은 기념품샵에서 이날 전시와 관련된 상품은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시 작품의 사진으로 만든 엽서가 있었다면 흔쾌히 구매했을 텐데. 엽서가 없으니 이 조야한 사진으로 대신 기억할 수밖에. 






계동에 남아 있던 오래된 대중목욕탕이 안경가게로 변신했다. 한 2년 전만 해도 폐업한 목욕탕 건물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새 젠틀몬스터가 입점했다. 다행히 반 세기 넘은 3층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개조해서 가게로 사용하고 있었다. 1층으로 들어가자마자 친숙한 하늘색 목욕탕 타일이 반긴다. 친구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실 나는 하늘색 목욕탕 타일을 좋아한다. 한국 대중목욕탕의 촌스런 타일은 물론이고 세비야의 정교한 목욕탕용 채색 타일까지. 그러니 남은 목욕 타일을 차용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든 것은 당연하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난간에 하늘이 비친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난간에 하늘이 비친다. 
옛 대중목욕탕 옥상 위에서. 
옛 대중목욕탕 옥상 위에서. 

사실 이 목욕탕의 매력은 3층 옥상에 있다다. 계동에서 계동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세무고등학교 담벼락이고 나머지 하나가 이 목욕탕 위다. 건물이 폐업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을 때는 올라올 생각도 못했는데, 오히려 안경가게로 바뀌고 난 후에 이 건물의 강점이 살아났으니 그야말로 전화위복이다. 건물 높이가 2층을 넘치 않는 계동에서 언덕 위에 위치한 이 목욕탕이 숨은 전망대였다는 걸, 목욕탕 손님들은 알았을까?





계동 골목에 위치한 백상정사.
계동 골목에 위치한 백상정사.
백상정사 골목길.
백상정사 골목길.

계속해서 중앙고 방면으로 쭉쭉 올라간다. 사람을 피해서 잠깐 옆길로 새는데, 느닷없이 절이 나타났다. 본존불을 모셔 놓은 대웅전(규모는 전혀 大하지 않다) 하나만 달랑 있지만, 절은 절이다. 하얀 코끼리 하나가 마당에 조용히 서 있다. 백상정사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따온 듯 싶은데, 왜 하필 코끼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 사찰에서 코끼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은데... 






중앙고 전경.
중앙고 전경.

계동길 막다른 곳까지 올라가면 드디어 중앙고 교정이 보인다. 토요일이라 학생이 없는 교정은 방문객 몇 사람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캠퍼스와 학생 만족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예쁜 캠퍼스를 가진 학교를 보면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처음 봤을 때 어쩐지 고려대학교 본관과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이번에 표지판을 다시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건축가가 같은 사람이다. 친일 의혹을 받는 창립자의 동상이 6.10 만세 운동 기념 표지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방문 n번 만에 찾은 북촌 8경. 
방문 n번 만에 찾은 북촌 8경.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북촌을 방문하면 한 번쯤 가본다는 북촌 8경을 처음으로 돌았다. 평소에 항상 가던 길 위주로 산책만 하고 말았더니, 정작 북촌 한옥의 꽃이라는 필수 코스는 놓쳤던 것이다. 언젠가 혼자서 찾아가 보려고 했지만, 언덕길을 오르다 말고 지쳐서 금방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는 책임감이 더 생긴다고 해야 할까? 옆에 가이드 해야 하는 동행이 있으니 햇빛이 내리쬐어도 꾸역꾸역 올라가게 된다. 길 자체는 표지판만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늘이 도왔는지 사람 없는 북촌 8경길에서는 동행도 나도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아무래도 주택가이다 보니까 큰 소리를 내기가 어렵고, 무엇보다 북촌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이 언덕 위에 오르니 마법처럼 말이 줄었다. 다행히 성향이 맞는 동행이어서 30여분을 대화 없이 걷기만 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떤 책에서 읽었듯이, 침묵과 정적은 정말 멋진 선물이다. 





산이 보인다!
산이 보인다!

산이 보인다고 신기해하다니,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북한산인지 인왕산인지. 아마 인왕산이겠지? 스모그야 사라져라. 






이곳은 가이드를 진행한 바로 다음날, 홀로 북촌을 찾아서 방문한 곳이다. 봉산재와 마찬가지로 작은 규모의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대여해서 운영중이었다. 옆 교회에서 운영하는 이 건물의 이름은 <소허당>이었다. 방문했을 때는 이탈리아 소도시를 여행하며 그린 펜 담채화가 전시 중이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오래된 건물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으니 오래된 공간에 전시하는 게 어울릴 것 같았다'고. 확실히 선 얇은 펜화로 밑그림을 그리고 옅은 담채로 채색해서인지, 남유럽의 고건물이 한옥 위에서도 튀지 않았다. 



'한옥에 걸린 액자'를 발견한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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