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작가노트> 표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 표지.
수도원과 장서관 조감도.
수도원과 장서관 조감도.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어라."



나는 아직까지 <장미의 이름> 서문에 나오는 위 인용구를 넘어서는 위안과 공감을 찾지 못했다.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6보격 시구("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보다 더 큰 위안을 주었으니, 매번 같은 장을 펼칠 때마다 이 다정한 옛 시인의 읊조림은 슬픔도 우울도 분노도 바람처럼 쓸어간다. (나는 요즘까지도 때때로 에코가 세상을 떴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살면서 다섯 번 정도 <장미의 이름>을 정독했다. 그 집필 과정을 기술한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를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책을 고르게 된 경위는 에코의 다른 책들을 골랐던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무더위를 피해서 도서관으로 피신한 여름날, 에코의 저작이 꽂힌 서가를 뒤적이고 있는데 이 얇은 책자가 손에 잡혔다. 책이 나를 선택했으니 거부할 도리가 있나, 읽을 수밖에. 백여 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길이의 책을 두 번 정독하면서, 포스트잇에 빽빽하게 메모와 필사를 적었다. 돌이켜보면 에코의 책은 대부분 수차례의 정독을 요구했으니, <작가노트>를 읽는 데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당연했다. 살면서 총 다섯 번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고 썼는데, 여기서 잠시 그 기억을 더듬어본다. 


처음 책을 알게 된 것은 15살 여름에 친척 집 서가에 꽂혀 있던 것을 빌려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중간의 난해한 부분들(중세 교회사와 이단 논쟁, 고전 시대의 철학가들, 필사와 채식 관행 등)은 모조리 건너뛰고 추리 부분만 읽었다. 그래도 추리 자체의 긴박함과 장서관의 트릭, 결말의 강렬함에 감탄하며 밤을 샜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독은 고3 수험시절이었다. 나름 독학으로 세계사 과목을 공부했다고 (여전히 난해한) 교회사와 이단 논쟁을 열심히 독파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여전히 수도원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 후 한동안 <장미의 이름>을 잊고 살다가, 3년 전에 직접 책을 구매하면서 3회독, 4회독, 5회독을 했다. 변덕이 잦은 편이라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경우가 잦지 않은데, <장미의 이름>만큼은 읽을 때마다 자꾸 무언가 새로 발견하게 되는 신기한 책이었다. 장담컨대 나는 앞으로도 여러 번 <장미의 이름>을 읽을 것이고, 그때마다 이 책에 관한 추억이나 애정, 지적 흥분 따위가 오래된 벽지의 지층처럼 겹겹이 덧씌워질 테다. 이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책이니, 그 창작 과정을 기술한 짧은 노트에 대해 장광한 찬사를 늘어놓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까. 조금 집요한 필기와 노트는 덤이다. 


<작가노트>를 읽으면서 독서 노트에 기록한 내용을 여기에 옮긴다. 대부분은 본문 중에서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을 직접 인용하거나 발췌, 요약한 다음 짧게 감상을 남긴 글이다. 길고 장황한 감상문이 될 것이나, 함께 읽어주시고 그 즐거움을 공유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에코는 '책이 완성되는 순간 작가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쓴 과정을 기술할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 "왜 썼고 어떻게 썼는지", 즉 책을 구상한 과정, 영감 받은 텍스트, 내용을 설계한 방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그러나 충분하게 설명한다. 탐정소설론이나 소설론, 포스트모더니즘과 반어 같은 문학이론 부분은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기타 중세를 향한 에코의 끝없는 매료와 그의 방대한 독서 중에서는 기억해 두고 싶은 부분이 참 많았다. 여기 간단하게나마 그 일부를 정리한다. 



1장. <제목과 의미> 


(p.10) "작품을 해석하지 말라. 그런데 제목이라는 함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말 일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작품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 고결한 원칙을 지키는 데엔 한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소설에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이 제목이라는 것이 작품 해석의 열쇠 노릇을 한다." 


1장은 <장미의 이름> 말미에 나오는 그 유명한 6보격 시구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제목과 주제의 의미를 요구하는 수많은 독자 및 평론가들의 의문 제기에 대해서 에코는 장미-이름 사이에 분명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만 암시할 뿐, 그 이상을 주지 않는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하고 소설의 독법은 저마다의 수수께끼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가 숨기기' 지론은 이어지는 제목론에서도 반복된다. 


(p.15)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지, 독자가 정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소설의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위안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위안은,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의 이해를 통하여 전혀 다른 독법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어렵도다. 에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짧은 소설의 제목을 지을 때도 이른바 '논문식 제목짓기' 방식을 사용해 왔다. 예기치 않은 독법을 발견'당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혹 공들여 쓴 글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에서, 제목에 최대한 정보를 구겨 넣고는 한다. '소설은 수수께끼여야 한다'는 에코의 주장에 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독자를 헷갈리는 제목이란 대체 어떻게 지어야 하는 걸까? 


(p.19)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3장. <당연히, 중세>


이 장에서 에코는 왜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 배경은 왜 중세여야만 했는지에 관해서 상세히 기술한다. '소설은 하나의 열망에서 시작한다'는 지론을 필두로 하여, 중세가 곧 취미였던 자신의 기록카드로부터 어떻게 하나씩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그 경위를 설명한다.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는 운명처럼 중세학에 매료된 에코의 경험과, 수도원 장서관에서 중세 텍스트를 열람했던 기억을 나열하는 서술부가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에코처럼 한 시대, 한 역사적 상상에 푹 빠지고 싶은 열망이 내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p.27) 소설은 하나의 열망에서 시작한다. 

"내가 이 소설을 쓴 것은 나에게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한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막연한 아이디어에 자극을 받고 1978년에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소설쓰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머지는 씌어지는 과정에서 붙은 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열망 하나에서 소설이 시작된다는 그의 통찰은 지당하다. 그런데 '저절로 붙여지는 살'이라는 것이 내게는 왜 이리도 드물게 찾아오는 것인지!  



(p.28) "처음에 나는 오늘날의 수도원에 상주하는 수도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 그러나 수도원이 되었든 수녀원이 되었든, 그 분위기는 무수한 중세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법이다."


암, 수도원은 필연적으로 중세를 떠올리게 만들고 말고. 한 번이라도 역사에 매료되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당연히(필연적으로), 중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p.31) "나는 1952년부터 모아 온 방대한 자료(파일 카드, 복사물, 노트 등)을 뒤적였다. (...)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중세가 내 나날의 꿈인 바에야,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하고 잘 아는 것에 관해 쓸 때 비로소 글은 써진다. 에코에게는 중세가 그 고리였으리라. 그나저나 수집한 자료를 파일 카드로 만들어서 목록화시킨다는 에코의 팁은 <푸코의 진자>에서도 다시 언급되는데, 아직 학술 연구에 있어서 컴퓨터나 온라인이 활발하게 사용되기 전의 일일 것이지만, 내게는 일종의 로망을 불러 일으킨다. 



"(...) 나는 중세에 관한 것만 아는 사람일 뿐, 현대에 관한 것이라고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것 말고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 그때 내 아내는 장작 더미의 불길이 전깃줄을 태우고 있는데도 그걸 모른다고 나를 비난한 적이 있다. (...) '하지만 나는 중세의 수도사들 눈에 저 불꽃이 어떻게 보였으리라는 건 알아.'" 


중세의 심상을 체화하거나 그들의 인지, 꿈, 믿음,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지식과 지각! 그 역사적 상상력에 감탄했고, 그렇게 되고싶기에 부러웠다. 중세를 상상할 수 있는 에코의 능력과 그의 인내로운 공부는 점점 내 본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p.33) "따라서 중세는 나의 취미(만일 직업이라는 말이 마땅하지 않다면)로, 끊임없는 유혹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중세가 취미라니, 얼마나 근사한 표현인가. 나에게도 역사는 귀중하고 소중한 취미이다. (나는 이 문장을 과거형으로 써야 할지 현재형으로 써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하긴, 학문만큼 취미와 직업이 근사치로 겹치는 영역이 또 어디 있으랴. 



* 독서의 기억들, 그리고 텍스트에 둘러싸인 안락함과 기쁨에 대하여. 


"그 편람을 뒤적거리면서 허비한 수많은 휴일들, (...) 박식한 수도사 비드를 연구하던 즐거움, 오컴에서 누리던 이성적인 위안...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 어찌 이뿐이랴? 성 브란다누스의 외국여행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 켈즈 사본을 통하여 입증된 사고의 증명, 켈트의 케닝기르에 몰두한 보르헤스, 쉬제 주교의 일기에 의해 점검되는, 권력과 설득당한 대중과의 관계. 이런 것들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옛 텍스트(곧 사료) 속으로 탐험해 들어가는 즐거움과 그것이 주는 몰두, 편안함을 나 역시 얼마나 그리고 꿈꿨던가. 




4장. <가면> 


이 장에서 에코는 중세에 대해 쓰려면 중세가 되어야 했음을 고백하고, 그러기 위해 중세 저자들의 텍스트를 수없이 재독하는 과정에서 모든 책은 다른 책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생생한 역사소설, 특히 역사가 취미인 사람(곧 역사가)이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서> 기술해야 하며, 이는 당대의 텍스트를 인용한다는 단순하면서 천재적인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쓰고자 하던 이야기의 첫머리도 '당연히, 이 책은 책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문구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1944년의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참전한 병사의 행로는 시대를 넘나드는 텍스트와 텍스트의 무수한 인용을 통해서 얼개 지어진다. 



(p.35) "나는 중세에 <대해서> 쓰고자 결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서> 쓰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연대기 작가의 입을 통하여 중세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곧 화자인 수련사였다." 


확실히 직접 당대의 1인칭 화자가 되어 쓴다면 중세<에서> 쓰기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몽타이유(가제)의 경우에는 이렇게 쓸 수 있다. 그러나 3인칭 화법을 유지하면서도 1944년<에서> 쓰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을 동원해야 할 것인가?



(p.36) "나는 중세의 리듬(수도원 특유의 시간 구분)과 중세적 순진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었다. 많은 경우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은 내가 해야 할 말을 대신해주곤 했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미 세상에 유포된 다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견해는 작중 윌리엄 수도사의 대사를 통해서도 재확인된다. 책이 책을 언급하고, 텍스트가 텍스트를 가리키는 보르헤스적 상호텍스트의 세계를 나는 얼마나 동경했던가? 처음 <바벨의 도서관>과 호르헤의 장서관을 접했을 때의 흥분을 기억한다. 무한한 도서관 혹은 상호텍스트를 향한 매료야말로 내가 에코와 보르헤스의 글을 좋아하게 된 제 1의, 그리고 유일한 이유였다. 





5장. <우주적인 사건으로서의 소설>


이 장에서는 <장미의 이름>을 집필하기 위해(=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대화의 시간, 중세 수도원의 돼지 사냥 계절, 걸음걸이 수까지 계산한 에코의 정밀함이 회상된다. 그중에서 1) 역사요소를 사용하기 위해 시기를 바꿔야 했던 점,  2) 망아 상태에서의 글쓰기 부분을 발췌한다. 



(p.45)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 실제로 나는 14세기보다는 12세기나 13세기에 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관찰력이 예민한 (...) 조사관, 그것도 가급적이면 영국인(상호텍스트적인 인용-셜록 홈즈를 가리킴)이 한 명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조사관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그것도 로저 베이컨 이후에나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바뀐, 14세기라는 시대 배경의 정합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에코는 다시 독서했고, 독서를 통해 13세기의 탐정관에 적합한 인물을 창조해 냈다. 그의 독서를 향한 인내와 느긋함에 찬사를! 



(p.48) "등장인물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자율적인 생명을 지니는 것이고,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종의 망아 상태에서 그 등장 인물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망아 상태에서의 글쓰기'에 관한 주장이 8장 <행보>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즉, '글쓰기는 손가락의 사고작용(물리적 의미 그대로)'라는 표현에 의해 재천명된다. 


(p.69) "글쓰기에는, 손가락이 타이프라이터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에도 나름의 생명력을 지닌 채 생각에 몰두하는 총체적 사고 작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글쓰기가 어떻게 손가락의 사고 작용일 수 있는지 (후략)"



* 왜 장서관은 불타야 했는가? 


중세에는 그것이 잦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된 결말이라기보단 중세<에서> 쓰려다보니 필연적으로 도출된 결말. 


(p.49) "결국 내 계획에 따르면 장서관은 전소하게 되어있었다. 이것은 우주론적-역사적 귀결이다. 중세에는 성당이나 수도원에 불이 붙었다 하면 부싯깃처럼 탔다. 화재가 없는 중세를 상상한다는 것은 화염에 싸인 채 떨어지는 전투기가 나오지 않는 2차 세계 대전 영화를 상상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얼마나 탁월한 비유인지! 



* 중세 연대기의 서술방식에 관하여.


(p.63) "어떤 사건을 기술할 때마다 백과사전적인 관념을 서슴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중세 연대기 작가들에게 공통된 스타일이었다. (...) 당시의 연대기 작가들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그랬다." 

번역된 중세 텍스트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장황한 수사가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중세<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을 바에야, 그들의 방식을 차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중세의 시점을 다루는 소설을 쓰면서도 대화나 화법은 현대의 것에 얽매이는, 심리적 압박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8장. <행보pace>


이 장에서 에코는 그 유명한 '소설로 들어가기와 산에 오르는 비유'를 쓰면서, 자기 소설의 난해한 도입부가 가지는 정당성을 설명한다. 한 책을 읽고자 한다면 우선 그 책의 행보(pace)에 익숙해지라고 말하는 에코의 당당함이 인상적이다. 소설과 행보에 관한 그의 신념은 즉물적인 텍스트와 독서가 넘쳐나는 요즈음 더 강한 울림을 가지고 다가온다. 인내심을 가지고 저자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한 책을 독파하게 되는 즐거움을, 무엇보다 나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았나? 인내하는 독서는 전율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준다. <장미의 이름>, <백년 동안의 고독>, <거미여인의 키스> 같은 난해한 도입부를 지닌 책에 매료된 이유도 애초에 여기에 있었다. 


(pp.65~66.) "어떤 사람이 낯선 수도원에 들어가 이레를 묵을 작정을 한다면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행보pace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런 수고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내 책을 읽어낼 수 없다. 따라서 이 첫 백 페이지는 고행, 혹은 입문의례와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이 싫은 사람에게는 나머지도 싫을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수도원이 있는 산으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산기슭에 남아 있는 게 좋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게 낫다."


이처럼 도입부에 난관(박식함, 정교한 독해를 요구하는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작가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에코는 '자기 독자층을 얻는 것'이라는 명쾌한 대답을 내린다. 


(p.74) "한 독자가 소설의 처음 백 페이지라고 하는 잠재적인 난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거기에 이어지는 것을 읽어낼 만한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따라서 작가가 소설의 모두(冒頭)에다 백 페이지의 잠재적인 난관을 매설하는 것은 자기의 독자층을 조직하는 작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어찌 위안을 주는 대답이 아닐 수 있으랴. 우리는(나는) 우리의 관심사와 견해를 공유, 동의해줄 독자를 찾아 얼마나 깊은 열망으로 글을 썼던가? '모두의 난관은 자기의 독자층을 조직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그의 말이 어느 하나 틀린 곳 없다. 






마지막 장. <역사 소설>


단순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끌어오기 위해서 시대 배경을 빌리는 '로망스 소설'과 진정한 의미의 '역사 소설'을 구분하는 에코의 시각에 동감을 느껴 일부를 옮긴다. 대다수의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 역사를 사용하는 방식은 '왜 반드시 그 시대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가령, 로망스 소설에서는 중간에 갑자기 중세에서 현대로 배경이 바뀐다고 해서 주요 인물의 캐릭터성이나 핵심 줄거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러한 로망스 소설은 독자의 심상에 로맨틱하거나 이국적인 기운을 불어넣는다는 목적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무작위로 선택된 시대를 가공, 변형해서 차용할 뿐이다. 나는 지금 그러한 류의 소설이 고증이 미비하다는 등의 이유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로망스 소설의 목적은 역사 소설이 지향하는 목적-교과서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당대의 삶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로망스와 역사 소설은 별개의 장르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자에서 역사는 무대 배경일 뿐이고 진정한 핵심 주제는 다른 곳(모험, 연애, 미스터리, 현실 풍자 등)에 있는 반면, 역사 소설은 반드시 그 시대여야만 하는 이유를 기저에 놓고서 당대를 재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같은 당대 역사의 충실한 재현이야말로 역사 소설을 창작하고 읽는 진짜 재미라고 생각한다. 


(p.110) "역사 소설의 경우, 등장인물이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즉 우리가 알 만한 인물일 필요는 없다. (...) 그러나 렌초, 루치아, 혹은 크리스토포로 수도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17세기의 롬바르디아에서만 가능했다. 우리는 이로써 등장 인물의 행위, 등장 인물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바로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건과 등장인물을 만들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은, 역사책이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그 시대의 이탈리아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에코는 역사 재현을 추구하는 소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당대의 실존 인물만 등장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가공의 사건과 인물을 쓰더라도 당대의 생활상, 심상, 믿음, 꿈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한 편의 훌륭한 역사 소설이 된다. 



(p.111) "나는 역사 소설도 마땅히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를, 장차 올 것의 원인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인이 결과를 지어내는 과정도 추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역사학 연구의 즐거움과도 일맥상통하는 발언이다. 흔히 역사학은 인과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나, 때로 사람들은 현재의 효용성에 지나치게 천착하여 과거가 불러일으키는 호기심, 과정을 추적하는 즐거움 자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거의 특정 사건을 단순히 현재 상황의 원인으로만 여기지 않고 그 전개 과정을 추적하는 일. 그 상상(물론 사료에 근거한 추론과 상상)이 첨가될 때 역사는 이야기가 되어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탐정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역사 공부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에코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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