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중간 중간 덕질 이야기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려고 쓴 글. 사진은 차마 보기 힘들어서 최소화. 









3부 유대인 대학살



부제는 유대인 대학살이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게 된 경위 및 이후 독소 전쟁의 진행 경과를 다룬다. 그 과정에서 나치 독일이 동유럽, 소련,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실행한 유대인, 포로, 민간이에 대한 학살 행위가 소개된다. 카메라는 1941년의 동부 전선에 멈춰 있다. 


걱정했던 것만큼 적나라한 학살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중반으로 치닫고, 악명 높은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이 등장할 때 즈음이 되면 그 참상도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다. 






† 탄압과 학살 현장을 찍는 나치의 집요함에 관하여. 


동유럽의 유대인 탄압부터 소련군 포로, 우크라이나 바비야르의 유대인 학살. 나치 독일이 전쟁 수행 중에 자체적으로 남긴 피해자의 사진 및 영상이 수백 건에 이르는데, 사실 다큐멘터리에 사용된 학살 및 수용소 영상의 대부분이 독일 측에서 남긴 자료다. 가령, 영국 선박을 침몰시킨 후, 쪽배 위에서 곧 죽을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선원에게 빵을 던져주는 영상에서는 가학심이 엿보일 정도다. 바르샤바 게토 지구의 유대인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촬영한 것, 생기 없는 그들의 시선을 클로즈업으로 담아 영화로 만든 것, 우크라이나 바비야르에서 벌거벗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줄지어 총살하는 현장. 동정심만 가득 일으키는 그런 장면들을 촬영함으로써 대체 어떤 선전 효과를 기대한 것일까? 나치의 행적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자신들이 학살, 학대한 대상을 집요하게 기록한 행위야말로 가장 납득하기 어렵다. 상식 대로라면, 오히려 그 증거를 처분해야 하지 않나? 혹 내부 선전용으로 찍었다 한들 점령지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처참한 현실을 보고서 독일인들이 저항하거나 거부할 것은 고려하지 않은 것일까? 공개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집요하게 게토와 수용소 내부를 촬영한 그들의 태도는 몇 번을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의 의식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어딘가 무섭게 비틀려 있다. 




† 41년, 영국의 처칠은 히틀러의 소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전을 이어가고, 루스벨트는 미국이 '유럽 민주주의의 병기고'임을 자처하고 나선다. 히틀러는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동유럽을 생산 가능 지역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히고, 결국 때 이르게 소련 국경을 넘는다. 북쪽의 레닌그라드, 정치 중심지인 중부의 모스크바, 석유 생산지대인 남부의 키예프 세 군데를 나눠서 동시에 공략한다는 바르바롯사 작전이 수립된다. 독일은 영국이 버티고 있는 서부 전선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부 전선을 열어버리고 만다. 독-소 전쟁의 시작이다. 


그러나 독일군은 러시아의 압도적일만큼 광활한 영토, 기온이 올라가면 눈이 녹으면서 진창이 되어버리는 땅, 지독한 혹한에 가로막힌다. 이중에서도 러시아의 압도적인 크기가 가장 큰 절벽으로 작용하는데, 이른바 '러시아를 점령하려고 한 군대는 망한다'는 속설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과연 어디까지 점령해야 러시아를 '정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남부의 키예프까지? 아니면 동쪽으로 치달아 시베리아에도 깃발을 꽂아야 정복이 완성되는 걸까? 이 나라의 지나치게 광대한 영토는 자국을 침략하려는 군대를 지치게 만든다. 무엇보다, 마을과 마을 사이가 아득히 먼 탓에 진군 중의 보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독일군의 한 병사는 편지를 통해 '며칠을 달려도 인적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인가에서 보급을 받을 수 없어 며칠을 굶었다'고 증언하며, 그 광대함의 공포를 알려준다. 




 나치는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학살 방법의 기틀을 닦아간다. 우크라이나의 유대인들을 처음에 처형할 때는 전통적인 방법인 총살 후 매장을 사용했으나, 죽여야 할 머릿수가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자 지도부는 더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낸다.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직접 파게 한 다음, 그 위에 여러 겹의 열을 세우는 것이다. 한 차례 총탄 세례를 퍼붓고 나면 제 1열의 사람들이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제 2열, 제 3열. 수천 구의 시신이 빠른 속도로 구덩이 안에 쌓이면서, 학살에 드는 시간이 줄어든다. 얼마 후, 총살을 집행하는 병사들의 정신적 충격을 염려한 히믈러는 가스실의 전신을 고안해낸다. 반대하는 장교에게 히믈러는 말한다. '이 전쟁은 무자비한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며칠 씩 계속되는 총살, 소처럼 갇혀서 천천히 굶어 죽는 70만의 소련군 포로. 점령된 동유럽의 게토를 처음 방문한 후에 유대인이 받는 취급을 보고 충격받았던 군인은, 나치 점령의 본질을 깨달았을까? 아니면 결국 동조했을까? 






5부 노르망디 상륙작전



4부는 독-소 전쟁(바르바롯사 작전)의 전개 및 일본의 진주만 습격, 태평양 전쟁 등을 주로 소개하나, 관심 분야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5부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사실 점점 열세로 치닫는 독일의 상황과 노르망디 작전 직전까지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42년, 일본의 습격을 받은 미국이 참전한다. 

소련에서 고전하고 있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공략을 감행하지만, 새로 참전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량을 지급 받은 소련군 앞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폴란드, 프랑스 점령 때와 마찬가지로 전격전(lightning war)을 통한 빠른 점령을 성공시키겠다는 히틀러의 작전은 실패한다. 그러나 히틀러와 장교들은 패배 소식을 끝내 국내 언론에 알리지 않는다. 본토의 독일인은 다가오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42년~43년, 영국은 에티오피아 근방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낸다. 이후 미국과 손을 잡고서 북아프리카 전역에 새 전선을 여는데, 이후 미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구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영미 연합군의 작전은 북아프리카를 먼저 점령함으로써 시칠리아-프랑스로 이어지는 지중해 지역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이다. 구 프랑스 식민지령인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무어인 부대가 연합군으로 참전하기 시작한다. 


43년, 영-미 연합군은 모로코, 알제리의 독일군을 차례차례 몰아내면서 해당 지역에 잔류해 있던 프랑스군을 연합군으로 흡수한다. 다급해진 독일은 비시 정부의 자치 하에 남겨뒀던 남부 프랑스를 마저 점령한 뒤, 지중해를 통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물자를 보낸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결국 미-영-(자유)프랑스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다. 시칠리아-이탈리아 남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연합군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유럽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탈리아에서는 현지 국민들이 무솔리니에 저항하면서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이나, 나치가 감금돼 있던 무솔리니를 탈출 시키고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한다. 


같은 시기, 바르샤바 게토에서 봉기가 일어나나 실패하고, 뼈만 남은 시체들이 끌려나간다. 



퍼벤져에서 버키와 107 연대가 파병됐던 지역은 대체 어디였을까 싶어서 다시 한 번 찾아봤다. MCU 위키에 따르면, 버키는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들어선 이후에 처음 파병되었으며, 구체적인 연대는 다음과 같았다. 


43년, 영국 파병. 이후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 

43년 10월, 이탈리아 아자노에서 107연대가 습격 받음.

같은 달, 알프스 산맥의 하이드라 기지에 포로로 수감. 

43년 11월, 스티브 로저스의 포로 구출. 

같은 달, 하울링 코만도스 결성. 이후 약 1년 간 대원으로 활동. 

44년 초(1~2월 추정), 열차 추락 사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스티브와 버키가 함께 활동한 기간이 더 길었다. 1년 동안 같이 싸우고 같이 활동했으니 그만큼 쌓인 이야기들도 많았겠지. 어쨌든 버키는 43년 북아프리카 전선이 종료된 이후, 유럽에 도착한다.

 





6부 전쟁의 끝



44년부터 45년.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한 전쟁은 여러 굵직한 사건들이 얽히면서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중에는 '최종 해결책', 죽음의 수용소 같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 클라이막스는 44년 6월 노르망디 해변에서 시작한다. 영-미-캐 연합군은 전함 오천 대를 동원하고 노르망디 지역의 다섯 개 해변으로 상륙한다. (각각 오마하, 유타, 주노 등의 별명을 붙인 해변들.) 상륙 첫날에는 기상 악화와 낙하산 공습 부대의 실수로 인해 작전이 지연된다. 이날 하루에만 미군에서 3천 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등, 연합군 지도자들은 절망하나, 일단 상륙한 다음부터는 순조롭게 독일군을 몰아낸다. 이후 연합군은 한 달여에 걸쳐서 노르망디 지역-프랑스 내륙으로 진군한다. 


이 작전에서 미군의 거대한 자금력과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느낄 수 있는데, 하루에 대형 선박을 한 척씩 건조하고, 세계 전역에 총 1,100만명의 병사를 파병한다. 이렇게 수송한 물량과 병사는 임시로 설치한 인공 항구를 통해서 운반한다. 

이제 독일은 서쪽의 영-미-프 연합군, 동쪽의 소련군이 동시에 압박해오는 가운데, 포위 형국이 된다.



†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서 영국과 독일의 항공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최초의 무인폭격기 V-1을 사용해서 런던과 영국의 대도시를 쉴새없이 폭격하고, 미군과 연합군은 드레스덴, 베를린에 대한 주-야간 공습을 번갈아 실시한다. 엘베의 피렌체라고 불리며 독일 제일의 중세 도시이자 산업도시였던 드레스덴은, 이 하룻밤 사이의 연이은 공습으로 흔적도 없이 잿더미로 흩어진다. 연합군이 프랑스 땅에 발을 들여놓고 비행기를 띄울 기지를 확보했을 때부터 독일로의 직접 공습은 예견되어 있었다. 

 처칠은 '그동안 독일이 유럽에 가했던 참혹의 대가를 이번엔 독일 국민들이 치르게 될 것'이라고 선고한다. 런던-베를린 폭격으로 런던에서 60만 명, 베를린에서 70만명이 사망한다. (무인폭격기 V-1은 이 기간 동안 총 2만 회를 출격했다) 

야간 공습을 당하는 드레스덴 위로 화염이 별처럼 쏟아져 내린다.




야간 공습을 받은 드레스덴 상공.
야간 공습을 받은 드레스덴 상공.



폭격 받은 베를린.
폭격 받은 베를린.




 

† 무기에 관하여: 무인전투기 V-1, 탄도 미사일 V-2, 원자폭탄. 39년 개전 당시, 그때까지도 장교들이 말을 타고 다녔던 풍경은 6년 만에 현대 무기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풍경으로 바뀐다. 전쟁터에 구시대의 유산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역사의 풍경은 완연한 현대로 접어든다. 




† 45년, 처칠은 독일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독일 내부의 히틀러 암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히틀러는 보복으로 2천 명에 가까운 장성을 일제 숙청한다. 전쟁 말기에 들어서자 나치 친위대가 군 전권을 장악하게 되고, 독일은 광기로 치닫는다. 히틀러에게 승리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 4년 전 무조건 항복 조건으로 파괴 없이 점령되었던 파리가 드디어 해방된다. 해방이 임박하자 시민들과 레지스탕스는 수면 위로 나와서 남은 독일군을 몰아낸다. 중절모를 쓴 신사는 탱크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점령당했던 유럽의 도시들이 하나둘씩 해방을 맞이한다. 




† 45년 초, 소련군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시킨 뒤 그곳의 실상을 영상으로 담는다. 비슷한 시기에 미군은 부엔발트의 강제 수용소에서 막대기처럼 뻣뻣해진 시체들의 무더기를 찾아낸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수용소를 찾은 아이젠하워가 인근 바이마르의 독일 주민들을 데려오도록 지시하고,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한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뜯어낸 문신과, 인피로 만든 전등갓과, 포르말린 속에서 작게 졸아든 사람의 머리를 본다. 모든 것이 너무나 참혹하며 공포스럽다. (이 사진은 차마 첨부할 수 없다.)


이로써 해방 직후의 수용소 촬영 영상을 보는 것이 세 번째지만,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영상을 볼 때마다 뱃속은 울렁거리고 심장이 시려온다. 처음 사진과 영상을 본 것은 3년 전에 방문한 DC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였다. 마지막 전시실의 안경 더미, 버려진 옷가지들, 잘린 머리카락들을 지나고 나면 당시 미군 부대가 촬영한 영상이 재생된다. 사람이 아사하면 나무 막대기처럼 가늘고 뻣뻣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시신이 너무 많아 인력으로 옮길 수 없어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희생자들한테 전염병이 옮는 걸 막기 위해서,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불도저로 시신을 치워야 했다. 거대한 불도저가 무색해질 만큼, 파도처럼 넘치는 시신들이 구덩이 안에 차례 차례 묻힌다. 나중에는 다 묻을 땅이 없어서 결국 태워야 했던 시신들. 6년 간 전쟁을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들이 왜 절망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는 회고가 나오는지, 절절히 이해했다. 




† 전쟁 말기의 나치는 대체 어떤 광기 때문에 그토록 대학살에 집착했는가? ('최종 해결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여진 이 작전의 본질은 단지 대학살이었다) 제국의 모든 열차를 다급한 군수물자 수송에 쓰기보다도, 유대인 수송에 더 많이 배치한 비합리적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하나? 희대의 불가해한 집착과 만행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느 제정신인 사람이 이토록 비효율적인 선택을 한단 말인가? 이 주제는 지속적으로,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라서 의문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전체주의의 어떤 속성이 이를 유발한 걸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아야 하나? 길을 잃은 질문들. 




† 악인들의 패망: 계속되는 연합군의 융단 폭격과 소련군의 베를린 점령 결과, 히틀러는 자살하고 독일은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비로소 악인들의 말로이다. 등장하는 화면들은 다음과 같다. 우상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폐기처분한 히틀러의 시신, 권총 자살 후 불에 타서 새까맣게 변한 괴벨스 부부, 성난 민중들의 발에 짓밟히고 훼손되는 무솔리니의 시체,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 헤스, 히믈러, 나치 장교들... 그러나 숯처럼 연소해서 간신히 인간의 형상만 유지한 괴벨스 부부의 시신은 아무런 동정도, 연민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미 그들보다 더 참혹한 수용소의 시신들을 보았기 때문에, 당연한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훼손된 무솔리니의 시신도 마찬가지다. 다만, 태평양 전투 중에 공습을 받아, 총을 들고 앉은 자세 그대로 검은 송장이 되어버린 일본군 병사의 영상만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까맣고 번들거리는, 나무처럼 굳어버린 얼굴과 손발. 


42년 5월 유럽에서의 승전 이후, 미군은 대대적인 공습과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로 결국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 루즈벨트는 서거했고, 전쟁은 끝났다. 곧이어 냉전이 시작되고, 나치가 물러난 수용소들은 이제 스탈린의 수용소가 되어 반체제 세력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 종군기자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몇 분은 이 모든 영상들을 촬영한 종군기자에게 바치는 헌사로 꾸며져 있다. 전투기 폭격, 공습, 최전선에서의 돌격. 그 옆에는 총도 없이 오직 카메라만 들고서 그 현장을 기록으로 남긴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군용 배낭과 카메라를 들고, 태평양의 밀림과 정글, 북아프리카의 사막, 러시아의 황무지, 혹한의 알프스 산맥을 찍었다. 또 다른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을 다큐멘터리는 '비무장 영웅'이라고 부른다. 




총을 쏘는 병사 옆에서 촬영 중인 종군기자.
총을 쏘는 병사 옆에서 촬영 중인 종군기자.




폭격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촬영중인 기자.
폭격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촬영중인 기자.




방충망을 쓰고 촬영 중인 기자.
방충망을 쓰고 촬영 중인 기자.





cockt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