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로저스는 느리게 자라는 나무였다. 여러 모로 늦된 아이였던 그는 출생부터 남다른 여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덕분에 그의 어머니는 여타 산모들보다도 훨씬 더 지난한 산고를 겪어야 했다. 서른 시간에 달하는 산통 끝에 배 밖으로 나온 아이는, 그 인내가 무심하게도, 조산한 미숙아만큼이나 여리고 약했다. 기운 빠진 몸을 일으켜서 아이를 받아든 어머니는, 막 출산을 겪은 자기보다도 더 파리한 안색으로 우는 갓난아기를 보고서 가슴이 내려앉을 뻔하였다. 만약 조금 더 마음이 여린 여인에게서 태어났더라면, 아이 스티브는 병원 밖으로 안겨 나오는 즉시 교회 공터나 고아원 계단 앞에 버려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조셉의 아내 사라는 강인한 마음과 인내, 담력을 갖춘 여자였기 때문에 친척들의 지친 한숨을 무시하고서 꿋꿋이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태어난 이튿날 곧바로 숨을 거두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아이는 그렇게 어머니의 용기 덕에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금방 멈출 것처럼 미약한 소리로 울면서도 끝까지 명줄을 놓지 않는 아들을 보고서, 사라는 인내의 성인처럼 꼿꼿한 사람이 되라는 뜻을 담아 스테판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태어나기를 천천히 태어난 아이는 성장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늦되어서 주위 어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오직 사라만큼이 모든 것이 허약한 체질 때문이리라 짐작하고 가만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렸고 걷는 것도 느렸으며, 입이 트이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가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의사를 걱정시키기까지 했으나, 일단 말귀가 트이고 나자 다른 아이들보다도 많은 질문과 호기심을 던져서 어머니와 선생들을 진땀 빼게 했다. 본래 조용하던 아이가, 일단 궁금한 것이 생기면 특유의 느릿하고 오밀조밀한 말투로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묻기를 멈추지 않으니, 아이의 고집과 끈기를 보고 다들 그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신기하다며 웃었다. 오직 그의 어머니만이 새삼스러울 것 없어하며 아이의 질문이며 수줍은 응석을 받아주었다.


한 인간에게 좋은 것을 몰아주는 법이 없는 하늘의 기벽은 이번에도 어김이 없어서, 스티브는 선하고 곧은 품성을 지닌 대신 고독을 벗하여 자라야 했다. 한창 또래와 어울려 다니며 사고치기 십상인 나이가 됐을 때에도 아이는 천성적으로 허약한 체질 때문에 그 무리에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에선 특별히 미움을 사거나 혼나는 법은 없었지만, 같이 공놀이라도 할라치면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바람에 금세 달리기를 멈춰야 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던 소년은 운동장의 참새며 동네 강아지, 골목길의 고양이,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모래 위에 그리며 시간을 죽이는 취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걸음도 느리고 달리기도 느리고 다른 동급생을 좇아가는 것도 느렸던 스티브는, 사람을 사귀고 세상에 발을 내딛는 것 또한 느리게 배워나갔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평탄히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사라 덕이었다. ‘넌 천천히 자라는 나무야. 하지만 느리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건 아니지.’ 난해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만 끄덕였던 열 두 살의 그는, 이후 살면서 같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몇몇 더 만나게 된다.



*


어머니의 바람을 따라 바르고 곧게 자란 스티브는 본의 아니게 소란스러운 일에 말려드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남들보다 천천히 성장하는 대신, 단단하고 옹골찬 나이테를 길러나가던 소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또래들이 있었던 탓이다. 곧잘 입바른 소리를 하고, 괴롭힘 당하는 생물을 보면 참지 못하고 뛰어드는 고집 센 성격 때문에, 스티브는 분수에 맞지 않게 얻어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자기 몸집의 두 배가 족히 넘는 열네 살짜리를 말리려다가 도리어 흠씬 두드려 맞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년 스티브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한테 당하는 수모는 생각지도 않고, 돈을 뜯기고 있던 꼬마가 불쌍해서 기어이 쓰레기통 뚜껑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방패를 붙잡고서 곧 날아올 주먹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분명 단단한 주먹이 코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는데, 어쩐 일인지 뜨겁게 흘러내려야 할 코피가 나질 않는 것이었다. 긴장한 스티브는 슬쩍 실눈을 뜨고서 눈앞을 살폈다. 으레 코앞에서 빙빙 돌고 있으리라 생각한 주먹 대신, 산만큼 커다란 그림자가 시야를 가리고 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훌쩍 커다란 키의 소년이 바닥에 나동그러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낯부끄러웠던 스티브는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면서도 변명하듯 대꾸했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었어.”

“알아. 그래도 두쪽 눈이 밤탱이가 되는 것보단 낫잖아.”


낯선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그리고 흙바닥에서 나뒹굴던 그의 겉옷을 탁탁 털어 건네주면서 말했다.

“아까 그 방패 멋지더라.”


커다란 두 눈이 서글하게 휘어지는 것을 보던 그때, 스티브는 처음으로, 남들보다 느린 자기의 주먹이 원망스러운 대신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기의 느리고 고집 센 (그리고 허약한) 주먹질이 아니었다면 골목길 옆을 지나치던 제임스의 주의를 끌 일은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인생 최고의 인연을 만나는 결과도 없었을 테니.


소년시절의 스티브에게 있어서, 자격지심으로 너덜해진 마음의 상처 위에 연고를 덧발라준 사람은 제임스가 처음이었다. 사춘기가 오면서 예민한 감수성에 휘말린 소년은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에게조차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러바칠 만큼 자존심이 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이였다. 새 학년으로 진급해도 도무지 자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육체는 스티브의 부끄러운 약점 중 하나였고, 특히 그 신체 때문에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은근한 외면을 당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체육시간을 틈타서 급우들끼리 축구 시합을 하게 된 적이 있었다. 스무 명쯤은 훌쩍 뛰어넘는 대인원을 차례차례 두 팀에 나누고도 모자라, 후보팀까지 선발했을 때였다. 일찌감치 탐나는 에이스로 뽑혀 간 제임스가 따분한 표정으로 편 가르기를 구경하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스티브는?”

“어?”

“스티브는 어디로 가냐고.”


일찍 변성기를 마친 버키가 낮은 목소리로 캐묻자, 나머지 녀석들이 모두 당황해했다. 지금처럼 시합이 열릴 때면 자연스럽게 뒷자리로 나가던 스티브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느려서 어느 팀에도, 아무 포지션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경기가 끝날 때까지 햇빛을 피해 그늘에서 구경이나 하는 게 당연했던 탓이었다.


“로저스는 원래 같이 안 해.”

“왜?”


주장 녀석은 그동안 아무도 던진 적 없는 질문의 표적이 되자, 떨떠름해하면서 대답했다.

“너무 느리잖아. 달리기도 어려워하는 애한테 어떻게 축구를 시키냐.”


곁에 있던 다른 급우들도 동의의 표시로 어깨를 으쓱였다. 약하고 힘없는 로저스는 혼자 쉬게 하는 것. 그게 모두가 동의한─심지어 스티브 본인도─암묵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올해 처음으로 로저스와 같은 반이 된 제임스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알게 되자마자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뭐? 그런 법이 어딨어? 심판 하면 되잖아, 심판!”

“우린 원래 심판 없이 했다니까.”


곤란해 하는 급우들의 표정을 보고서 당사자인 스티브마저 얼떨결에 만류하러 나섰다.

“버키, 애들 말대로 난 한 번도 뛰어본 적 없는 걸. 그냥 뒤에 나가서 쉬고 있을 게.”


그러나 한 번 마음먹으면 고집이 세지는 버키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팔다리가 길다는 장점을 이용해서 어느 새 뒤로 빠지려는 스티브의 손목까지 쥐고서 도망치지 못하게 잡고 있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규칙은 알지? 넣으면 골, 막으면 실패, 손닿으면 패널티. 그래그래, 그거만 알면 됐어. 네가 하는 거다, 심판.”


그렇게 버키가 순식간에 상황정리를 해버렸고, 스티브는 어안이 벙벙하던 새에 반쯤 떠밀리듯이 심판 역을 맡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이미 어설프게 그은 하프라인에 서서 호루라기를 불고 난 뒤였다.


평소 같았으면 금이 간 자존심을 숨기고 싶어서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그날 시합이 끝나고 다른 급우들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갈 때까지도, 스티브는 화를 내지 않았다. 퉁명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오랜만에 느끼는 헐떡이는 심장 박동이, 땀에 젖어 달라붙는 옷자락이, 이마 위를 스치는 바람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심판이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던 때라 다른 녀석들을 따라 금 테두리를 왔다 갔다 뛰었을 뿐이지만, 남들과 같은 박자로 뛰는 그 순간만큼은 아픈 다리도 잊고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건, 경기가 끝나고 다들 옷을 갈아입으러 돌아갈 때나 되어서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축구 시합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스티브는 겉도는 자기를 다른 급우들 사이로 이끈 사람이 누구였는지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버키를 찾아갔다. 수도관 옆에서 상체를 푹 숙이고 철철 흘러나오는 물에 머리를 적시고 있던 친구를, 뻣뻣하고 어색한 손짓으로 툭툭 쳤다.


“아까, 고마워.”


자존심 때문에 세 단어 이상으로 잇지도 못한 재수 없는 인사였지만, 제임스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멱을 감던 것을 멈추고 스티브와 눈을 마주친 그는,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시원시원한 미소로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빳빳하게 수그린 스티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달리기가 좀 느려도 따라갈 순 있는 거지. 늦는다고 기회도 안 주면 서럽잖냐.”


아직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 타락 틈새로 맑게 휘어지던 눈매. 그 눈매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후로 스티브는 그때까지 머리로만 이해했던 ‘친구’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었다. 늦게 만났으나 그 후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을, 소중한 인연이었다.









언젠간 쓰겠죠 

cockt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