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임) 중간에 나오는 <갈색 기모노>의 모델은 Sam Rollinson이라는 이름의 '여자'라고 합니다. 안토니 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오필리아>의 오마쥬.
<오필리아>의 오마쥬.




쓴 소리 좀 해야겠다. 나라고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당일 관람한 전시에 관한 비판을 당장 그날 작성하는 사람의 마음도 편하진 않다. 그러나 예쁜 상업 이미지에 혹해서 전시장을 찾았다가 덜컥 만나버린 예쁜 불편함,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이미지의 가면 뒤에서 은은히 풍기는 만연한 미소지니, 그런 것들을 한 번 느낀 이상 마냥 잊어버릴 수만도 없는 일이다. 가급적 좋은 추억을 남긴 책, 전시, 여행지 등에 관한 감상을 기록하고자 마련한 카테고리지만, 응어리져 남을 불쾌감이라면 차라리 지금 여기에 솔직히 털어놓는 편이 좋으리라. 


내로라하는 보그 사진가들이 지난 수십 년 간 촬영한 '루브르 박물관 컨셉'의 사진 작품들을 공개했다. 큰 골자는 '서양 미술사의 명작들을 오마쥬한 패션 사진'이다. 르네상스부터 인상파, 현대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사의 여러 국면들이 상업 사진으로 재해석, 변주되어 촬영되었다.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아이디어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은 서양 고전 미술만 보는 것보다는 확실히 대중의 관심을 끌기 쉽고, 상업 사진 고유의 편하고 아름다운 미적 감각이 예술 전시의 벽을 낮추고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가 전시를 가면서 기대한 것도 딱 이대로였다. 편안하고 익숙한 예쁨들, 여기에 약간의 고전감을 더함으로써 나의 작은 허영심까지 만족시켜줄 전시. 분명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그림에서 떨어져서 전시장을 가득 채운 관람객을 둘러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여긴 남자들의 시선이 너무 많아. 


불쾌하다. 전시된 예쁜 여자 모델들의 얼굴이며 신체를 유심히 바라보는 남자 관객들의 눈이 기분 나쁘다. 예쁜 패션 사진들을 보러 와서 예쁜 걸 보고 감탄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이야? 나조차 내 반응이 낯설었다. 그래도 이 거무튀튀하고 찝찝한 기분은 거둬지지가 않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하다, 깨달았다. 총 5부까지 이어지는 이 많은 사진 중에서 남자 모델을 사용한 작품은 다섯 개조차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전부 여자들, 젊고 예쁜 패션모델들이다. 삼 분의 일은 파격적인 옷을 자랑하고, 삼 분의 일은 예쁜 얼굴로 고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나머지 삼 분의 일은 나체로 카메라 앞에 선 여자들이다. 원본에서는 중년의 여인으로 그려진 성녀 엘리자베스조차 이들 패션작가의 카메라 앞에서는 젊고 탱탱한 여자로 변신한다. 예쁜 건 나도 좋아한다. 세상에 젊고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나? 내가 바라는 점은 제발 그런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욕구를(여성의 신체미를 소비하는 욕구는 흔한 믿음과 달리, 다분히 사회적인 결과물이다) '고고한 예술'로 포장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왜 젊은 남자 모델의 사진은 적으냐는 식의 야유 섞인 볼멘소리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상업 예술이라 한들, 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젊은 여성의 우상화', 더 정확히는 '젊은 여성의 객체화', '젊은 여성의 신체 소비하기'에 진절머리가 나는 것뿐이다. 아무리 눈치가 보인다 한들, 그 대상화의 당사자로서 당연히 느끼는 불쾌함과 분노의 소리를 없는 것처럼 지워버릴 수는 없다. 나는 '고전과 상업의 결합',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 사이의 장벽 넘기'라는 캐치프라이즈를 내건 전시회가 조금 더 이성적이기를 바랐다. 사회 부조리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대담함, 정치적 민감함까지 바란 것도 아니다. 다만 적나라한 미소지니 때문에 전시 관람 자체가 방해받지 않을 정도만 되면 괜찮았다. 큰 걸 바란 것도 아닌데, 미소지니에 찌든지 오래된 패션예술계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로 나를 미소지니의 전람회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그만 좀 하지! 


혹시라도 이 모든 부작용이 '패션지' 보그에서 기획, 주최한 '상업' 사진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곤란하다. 애당초 서양 미술사의 긴 '여성 객체화' 역사가 뒷받침 되어 주지 않는다면, 고전 미술을 오마쥬한 이 작품들이 미소지니적 시선을 그대로 답습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예술지식인들이 성역화 하고 미술상이 번성시킨 서양 미술의 역사는 미소지니로 점철되어 있다. '뮤즈'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소아성애(나는 갓 2차 성징이 온 소녀가 전라로 자신의 음부를 가리고 있는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창녀-성녀 이분화 패러다임, 나체로 해변에서 뒹구는 여인들, 신화의 막을 빌려 마음껏 에로틱한 누드화를 그린 유럽의 그림들. 사례는 끝도 없이 나온다. 사실상 서양 미술사에 발가벗은 여인들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인문주의의 문을 열었다고 칭송되는 보티첼리의 '세 여신'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영영 꽁꽁 싸맨 성모 마리아나 등장하는 중세 이콘화나 보고 살았을 것이다. 누드를 그리지 말라는 게 아니다. 육 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술계의 근간이 된 남성들의 적나라하고 폭력적인 성적 욕망을 '고급 예술'로 치장하지 말라는 거다. 모든 인간 행위는 근본적으로 위선과 가식이라지만, 나는 예술계의 그것만큼 정교하고 뻔뻔한 가식을 본 적도 없다. 미술사 속의 우상은 오직 남자들의 우상, 그들의 치밀한 예술성은 여성을 객체화해서 얻어낸 예술성. 그 질린 패턴을 내가 2017년의 현대 사진전에서조차 봐야 한단 말이야? 그것도 현재 가장 잘 나가는 패션지가 기획한 전시에서? 난 화가 난다! 


그러니 난 써야겠다. 나는 이 예쁜 불편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의 미소지니가 싫다. 








15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측면 초상화가 왜 헐벗은 젊은 여성으로 변해야 하는가?
15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측면 초상화가 왜 헐벗은 젊은 여성으로 변해야 하는가?




원작이나 일화에서 중년의 여성으로 기록된, 허리 굽은 성녀 엘리자베스는 왜 또 회춘해야 하는가?
원작이나 일화에서 중년의 여성으로 기록된, 허리 굽은 성녀 엘리자베스는 왜 또 회춘해야 하는가?

  



분칠한 로코코 여성 귀족의 테마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사진. 치명적인 표정은 좋은데, 한쪽 젖은 왜 까고 있어야 하지?
분칠한 로코코 여성 귀족의 테마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사진. 치명적인 표정은 좋은데, 한쪽 젖은 왜 까고 있어야 하지?





전체 작품 중에서 '잘 꾸민' '젊은 남자'가 등장하는 사진은 이것이 유일하다. <갈색 기모노>
전체 작품 중에서 '잘 꾸민' '젊은 남자'가 등장하는 사진은 이것이 유일하다. <갈색 기모노>





나머지는 이렇게 '나폴레옹을 오마쥬했다'고 하는 사진들 정도다. 작고, 땅딸막한, 보잘 것 없는 남자.
나머지는 이렇게 '나폴레옹을 오마쥬했다'고 하는 사진들 정도다. 작고, 땅딸막한, 보잘 것 없는 남자.






조금 진부한 웨딩사진 같다. 
조금 진부한 웨딩사진 같다. 











그나마 숨통을 터준 것은 정교하게 촬영된 정물화, 풍경화 정도였다. 세심하게 선택된 소품과 치밀한 각도 계산, 후보정 과정을 거치면서 3차원으로 촬영된 사진은 2차원 위에 그려진 회화처럼 평면적이고 정적인 순간으로 변모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기 위해 발명된 사진기가 이젠 2차원의 회화를 흉내 낸다. 기발한 발상이 편안한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차라리 정물화 컨셉으로 구성됐다면 전시가 더 알찼을지도 모르겠다. 

















cockt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