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다량 함유 










1. 깁슨의 선함: 참 믿음직스러우면서 천성이 선한 사람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첫 등장 씬에서 토미와 비교해서 체격이 듬직해서 그런 것도 있고, 잔교에서 보여준 기민함이나 생존력이 믿음직스럽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 보통 그렇게 생존력이 강한 인물은 이기적으로 그려지는 관례가 있는데, 깁슨의 경우 그런 관례를 깨고 선함과 행동력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 만난 토미와 의심 없이 수통을 나눈 것, 침몰하는 배에서 망설임 끝에 결국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것. 사실 깁슨은 가장 먼저 탈출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실제로 몇 초만 더 늦었더라면 폭발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침몰하는 갑판 위에서 다시 방향을 돌린 선택은 참... 영화적이다. 배에서 빠져나온 후에는 끝까지 알렉스와 토미에게 밧줄을 내려주는 장면도. 인류애가 충전된다는 말이 이렇게 딱 맞을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진짜 영웅은 역시 깁슨이라니까.



2. 콜린스의 성격: 팬덤 동인설정에서 묘사하는 것만큼 그렇게 얌전하거나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터프할 만큼 무뚝뚝하지도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나이대 흔한 청년답게 적당히 털털하고, 적당히 호기롭고, 적당히 겁도 먹지 않았을까 ? 어쨌든 영화 덩케르크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그때 그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니까, 콜린스도 그렇지 않을지. 


3. 시공간 통합: 잔교, 바다, 하늘로 삼분되어 있던 시공간이 본격적으로 합쳐지는 시점은 역시 콜린스가 바다에 착수하면서부터인 듯. (영화의 긴장도도 이때부터 고조되기 시작한다) 콕핏에 갇힌 콜린스를 피터가 구해주면서 '바다'와 '하늘'이 먼저 통합되고, 이어서 문스톤 호의 구출작전이 진행되면서 마지막으로 '잔교'가 합쳐진다. 특히 이 시점에서는 탈출하려는 토미와 구출하려는 문스톤 호 옆에서 파리어가 모는 스핏 파이어가 저공비행으로 적기를 추격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삼분할 플롯이 최종적으로맞물리면서, 감독의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시점 분할의 매력이 완성된다.


4. 마지막에 인용된 처칠의 연설 중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신세계'란 미국의 참전을 암시(혹은 소망)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으나....... 잘 모르겠다. 전쟁 발발 시부터 처칠이 계속 미국이 참전해줄 것을 바랐다는 걸 생각하면 그럴듯하기도.


5. 근 2주 반 만에 다시 관람하니까 ,확실히 간격을 짧게 두고 보던 때보다 집중이 잘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여도 어느 정도 텀을 두고 보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분위기를 다시금 체험한 기분이다. 한편으로는 한동안 2차 창작을 너무 많이 보는 바람에 무의식 속에서 변형, 왜곡됐던 해석이 다시 제 방향을 찾는 것 같기도. 





6. 최근 <영국인 발견>이란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 세 가지. 


a) 영국인들의 줄서기(queuing): 버스 정류장에 한 명이 있어도 혼자서 줄을 선다는 영국인의 독특한 '줄서기' 집념을 알고 나니까, 영화 초반 해변에서 군인들이 줄 맞춰 서 있던 장면이 어쩐지 새롭게 보인다. 생각해보면 적군에게 포위된 극한 상황에서, 그것도 장기간 지속되는 고립 상태에서는 아무리 잘 훈련된 군대라고 해도 흐트러지기 쉬울 텐데, 그 순간에 줄서기를 고수한 것은 영국군의 기강이나 시민의식이 특별히 뛰어나서라기보단 평소 민간인일 때부터의 습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닐까... 


b) 'Want some tea?' 영국인과 차: 도슨 네가 떨병이를 진정시키려고 계속 차를 권하는 것이나 구출된 병사들에게 일단 차부터 배급하는 행동에는 차에 관한 영국인들의 미신적 믿음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영국인들에게 차란 말하자면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다. 진정제 대용으로 차, 각성제 대용으로도 차,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윤활제로도 차를 사용한다. 동일한 식품을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 각성제로, 때로는 진정제로 사용하다니 모순적인 사고방식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차'는 영국인들의 미신이다. 


c) 페어 플레이 중시: (어디까지나 저자에 따르면) 영국인들의 사고 체계에서 페어 플레이는 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들의 'fair play' 정신을 추구하는 패턴은 타 문화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영국인들이 공정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그런 가치를 추구한다는 거지) '줄서기'를 향한 놀라운 집착도 이 페어플레이 추구의 한 종류다. 그렇다면 난파선에서 토미가 깁슨을 내쫓으려는 전우들에게 반대하며 "공평하지 않아(That's not fair)", "그래도 잘못된 거야(still that's wrong)"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영국적 사고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만약 한국이나 다른 문화권에서 이 장면을 찍었다면, '공정함'보다는 깁슨과 토미의 사적인 친밀감, 기타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적 이유를 들어서 토미의 만류를 서술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토미가 깁슨을 옹호한 이유로 둘 사이의 깊은 유대나 친밀감을 드는 것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시 알렉스가 깁슨을 의심하고 몰아붙이자 당황하던 토미의 행동, 특히 '아니라고 말하라'면서 조급해하던 토미의 표정을 생각하면 둘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생긴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나 이 장면에서 토미는 처음으로 제 나이 대의 어린 청년 모습으로 돌아간다. 사실 프랑스인이라는 깁슨의 고백에 허탈해 하던 토미의 그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오래토록 떠오른다. 너무 어렸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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